현고운-almost25

1프로의 어떤 것

프롤로그

성공은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

에디슨 그 친구는 99%가 엄청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한 말이겠지만

내 칠십인생 경험으로는 번득이는 하나의 영감이 아흔아홉의 노력보다 우선할 때가 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마지막 1%만은 내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이고

그 1%는 때로는 99%를 변하게도 할 수 있으며 내 인생을 완전하게 다르게 할 수도 있다.

마지막 1%가 없이는 전체가, 때로는 인생이 완성되지 않는다.

내게 있어 그 1%는 세월이 주는 경험일수도 있고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팔자일수도 있으며 아주 우연한 행운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건.....

저 높은 곳의 어떤 분이 정해놓은.....어쩔 수 없는... 운명일 수도 있다.

다현은 경은 문제를 생각하며 무력한 자신에 전철 한구석자리에서 한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1호선 전철은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다현은 양손에 잔뜩 짐을 들고

사람들 사이에서 휩쓸려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고 있는

허름한 잠바차림의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애들 키만한 돗자리를 하나 들고 낡은 파란색 배낭을 매고 있는

그의 깊은 주름살과 반백의 머리는 그동안의 삶이 결코 녹녹치만은 않았음과 허

름한 옷차림은 넉넉치 않은 살림살이를 느낄 수 있었다.

다현은 무의식중에 할아버지를 향해 일어섰고 겨우 자리를 잡은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옅은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사람들 사이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던 할아버지는 부평역이 되자 그 짐들을 챙기고 있었다.

「잠깐요, 할아버지. 제가 꺼내드릴께요」

다현은 엉거주춤한 할아버지 대신 짐을 챙겨들었다.

미안해요, 고마워요를 연발하는 할아버지의 짐이 제법 무거운데 놀라며 그녀는 한 손에

그녀의 가방을 또 한 손엔 돗자리를 든 채 사람들과 할아버지와 함께 내렸다.

「이렇게 무거운데 손주들이랑 같이 오시지 그랬어요, 버스정류장까지 같이 가요」

어느새 그녀는 할아버지의 위태로운 돗자리를 들고 함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손주 이야기에 할아버지 눈빛이 틀려졌다.

「그 녀석들은 ... 있으나 마나한 ... 불효막심한 것들, 지들이 혼자 큰 줄 알고」

할아버지는 코웃음을 쳤다.

「내 벌어준 재산 야금야금 빼내서 쓰는 놈들..  흥.」

집안일이 조금 남부끄러웠던지 할아버지는 관심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자네는 뭘 하나?」

「저요?」

이런 것까지 얘기해야 하나 싶지만 그녀는 단호한 성격이 못됬다.

특히 이렇게 동정심이 유발되는 상대한테는 더더욱.

「저는 학교 국어선생님이에요」

「아이구, 학교 선생님이시구만」

할아버지는 그녀가 선생님이란 말에 그녀를 대하는 태도마저 틀려졌다.

역시 옛날 분이다. 그림자도 밟지 않는 옛날 분... 그때가 좋았지. 그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그 허름한 할아버지와 헤어진 그날은

오후 햇살이 눈부신 어느 5월의 봄날이었다.

1

유경은 고개를 푹 숙이고 저 고약한 실장이 저 냉정한 음성으로 조용한 윽박을 지르기 전에
이 사무실을 나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리라 생각했다.

스물여섯 살 처음 본 실장은 한마디로 여성의 꿈이었다. 선량해 보이는 외모에 깍듯한 매너.
집안과 상관없이 인정받고 있는 능력, 그 모두가 TV드라마 남자 주인공 같았다.

서른의 그가 결혼을 안했다는게 운명처럼 느껴졌고 그가 미혼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의 비서생활 이 년이 지난 지금도 그가 아직까지 미혼이란 사실에 마음속 깊이 감사한다.

'세상의 불쌍한 여자 하나 구제한 거라고, 저런 인간이랑  결혼해봤자 그게 바루 지옥일 거야
, 될 수 있으면 저련 사람은 결혼 안하는 게 도와주는 거라구...

그렇구 말구...'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유경도 충분히 알고 있다. 저 실장이 아직도 결혼 안한 이유를.

「저... 실장님, 전화...」

유경은 누구보다 실장성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전화 얘기를 꺼냈다가는 틀림없이 날벼락을 맞을 거란 걸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전화는 핫라인으로 유경도 어쩔 수가 없었다. 벼락을 맞는 수밖에는.

「한유경씨, 머리 나빠? 전화 연결하지  말랬잖아」

역시 나다. 저 성질은 죽어야 고쳐질 거야

「이 변호사님에요. 불랙콜로 왔어요」

성현그룹 회장실과 연결되어 있는 새까만 전화기를 연결하고 있는 핫라인을 지칭하는 불랙콜.

사적인 전화통화로는 절대 사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회장실과 사장실, 기조실장만이 통화
할 수 있는 보통은 직접 받는게 관례인 반면에

이재인 실장은 항상 유경을 통해 전화를 받고 있다.

「변호사가 건방지게 콜을 해」

재인이 투덜거리자 유경이 얼굴을 찡그렸다. 다 들리겠다.

「이재인입니다.... 네... 아니, 지금 바쁜데요, .... 알았어, 아니 내가 그리로 가지. 응」

좋은 말로 시작했다 반말로 끝나는 건 또 뭐야. 전화받는 매너까지 꽝이네.

아무튼 오늘 점심은 해방이다.

「다다야, 정말 괜찮은 자리야.」

엄마는 막내딸을 구슬리느라고 무릎을 맞대고 있었다.

「이만한 사람 또 없댄다.」

「엄마 저번에도 그만한 사람 없다고 그랬어」

다현은 엄마의 설득에 익숙해진 듯 싱글거렸다.

「얘, 이 사람은 의사야, 사자 붙은 신랑이 어디 쉬우니」

「우리집에도 사자 붙은 사람 둘이네 있네. 뭐, 나도 사자 붙었다구」

「그거야 그렇지만 얘, 얼굴도 훤하겠다. 그리고 집안도 제대로 된 집이래, 또  둘째란다. 아주 나무랄데 없는 청년이래」

「아이구 우리 서현 오빠는 장남이라 장가는 다갔네.」

다현은 딴전을 피고 있었다.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라지, 뭐.

그녀는 엄마가 몸이 달을 때까지 기다려야 유리하다는 걸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옥희 아줌마가 어려서부터 봐왔대, 이제 집도 장만하구 병원도 곧 채린다더라」

「아니, 그런 사람이 여태 연애도 안하고 뭐하고 있었대. 신기하네 그거」

「공부하느라 바빠 그랬다잖니」

엄마가 보지도 못한 사람을 역성을 들고 나서자 다현은 코웃음을 쳤다.

「서현 오빠는 연애만 잘하더라.」

「얘, 니 오빠는 틀리지.」

엄마는 열을 내고 있지만 다현 누나는 심드렁한 표정이다.

다현 누나는 작년까지는 엄마의 결혼재촉을 완강히 거부했었다.

결혼할 생각이 없다느니, 난 혼자가 좋다느니 하면서.

그러나 올해 들어 누나는 제법 선도 보고 엄마가 추천하는 신랑감 후보에 관심도 가지고 있었
다. 누나의 그런 행동에 엄마는 고무되어 누나가 생각을 바꾼 줄 안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다.

시집가기 싫다는 건 천하의 거짓말이고 다현 누나도 예외가 아닌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누나는 약아진 거다. 수법이 고단수가 되어버린 누나를 엄마는

아직 파악 못하고 있는 거다.

준현이 보기에 다현은 의도적이었지만 엄마는 아직까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다현
을 유심히 살펴보는 준현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엄마 몰래 살짝

눈을 찡긋거렸다.

「알았어. 엄마. 시간 내볼게. 근데 입고 나갈 옷이 마땅치 않네」

「얘, 그럼 이번 토요일날 한 벌 사자.」

엄마는 딸내미 마음 바뀔까봐 얼른 제의했다.

「엄마가 사줄 거지?」

다현 누나가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나. 선볼꺼야?」

이층으로 올라서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준현이 물었다.

「보지 뭐, 모처럼 근사한데서 밥 한 끼 먹는 거 좋지」

「그게 다야」

준현은 기가 막히려 하고 있었다.

「아니, 거기다 옷도 한 벌 생기고」

그녀의 누나가 싱글거렸다.

「괜찮은데.」

다현은 고개를 제치고  SH호텔을 바라봤다.

'음.. 생긴거 만큼 밥도 맛있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식도락가였다. 좋았어, 오늘은 여기서 밥까지 먹어야겠네, 치과의사라니까 돈은 많겠지.

호텔 현관을 들어서자 자동문이 저절로 열렸다.

얘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호텔 SH는 처음이다.

'으흠. 좋은데 '

유월의 이른 열기가 이곳에는 미치지 않는 모양이다. 아주 시원한고 상큼한 실내였다.

그녀가 어정쩡하고 있자 잘 차려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어디 찾으시는데요? 데스크는 저쪽입니다만」

음.. 이 호텔은 얼굴 보고 직원을 뽑나 보네

「예? 아, 아니에요 커피숖으로 갈 거에요」

그러자 그 직원이 고개를 약간 숙이며 라운지 왼쪽을 가리켰다.

「저쪽입니다」

「고맙습니다.」

'직원교육을 잘 시켰군'

그녀가 싱긋 웃으며 인사하자 재인도 따라 묵례했다.

'흠. 선보러 왔군.'

은은한 돌체비타의 향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2

「이재인 실장님 이쪽입니다.」

로펌의 복도는 일요일라 그런지 조용하고 한가했다.

젊은 변호사 사무실로 들어간 재인은 인상을 북 긋고 소리를 질렀다.

「집어쳐.」

재인이 노려보자 젊은 변호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난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구, 형」

「무슨 일인데 니가 불랙콜까지 이용한거니?」

그가 소파에 편하게 앉자 재선은 커피를 따라 건네주었다.

「회장님이 유언장을 수정하셨어 」

정색을 한 진지한 목소리였다.

「상관없어. 나랑은 그게 그렇게 중요한 내용이니?」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알고 있다. 이재인의 목표가 단순한 경영세습이 아니란걸.

왕위를 이어 받듯 그룹을 넘겨받은걸 원하는 사람이 아니다.

「형이랑은 관계가 있거든, 할아버지가 형한테는 꼭 공개하라고 지시하셨어.」

「새삼스럽게 내 이름이 유언장안에 있다고는 하지 마라.」

처음 유언장에서 이회장은 재인의 이름을 누락시켰다.

공개된 유언에 모두들 그 사실에 놀라했지만 재인만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그의 돌아가신 선친과 외가쪽에서 준 지분만으로도 대주주였다.

할아버지인 회장의 직계 상속자로서 유산따위 없어도 충분할 정도지만 주위사람들의 그 의외
의 사실에 당황해했다.

이회장이 그를 후계자로 학습시킨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재인이 상속에서 빠짐으로 해서 한동안 그룹은 권력의 암투시장으로 변해 버렸다.

물론 지금이야 워낙 이회장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지라 아무도 내색은 못하고 있지만
모두들 손익계산들을 하느라 머리를 굴리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현실이었다.

「형 말대로 그런 건 아니야」 재선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바뀐게 없는데 뭐가 나랑 관계냐?」

「음... 」재선이 약간 머뭇거렸다.

「뜸들이지 마. 뭘해 도 안놀랄테니까. 」

성미급한 사촌형이 부드럽게 재촉했다.

재인은 기대하는게 없었다.

「음... 형한테... 조건이 붙어 있어.」

「뭐야 그게... 조건 붙여 나한테 상속하신다는 거야」

재인의 눈썹이 올라갔다.

「아니.. 그게 아니라. 형한테 상속안하시구, 음....」

「빨리 말해, 그 조건이라는 거 진절머리 나니까. 옛날에도 그러셨어.」

「음... 음... 본론만 말하면, 형수말야...」

재선이 침을 꼴깍 삼켰다. 형의 반응이 걱정스러웠다.

「그러니까 형의 아내될 사람한테 상속하시겠대. 형수한테 상속하시는 대신에 처분권과 이사회 발언권은 형한테 넘어가는 거구.

물론 형이 그 여자분과 결혼했을 경우만 그렇구..」

재선이 무슨 말인가 계속하려 하자 재인이 소릴 질러댔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할아버지가 지금 나랑 결혼할 여자를 정하셨다는 거야?.」

「바로 그거야」

「정말 바뀐게 없군」

재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형 웃을 일이 아니야. 아무리 형이 관심없다구 그래도 이건 심각한 일이라구」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재인이 툴툴털고 일어났다.

「형! 나 지금 농담하는거 아니야, 이건 진짜 유언장 내용이라구」

「알아 네가 이런 일로 장난하는거 아니라는 거. 나도 지금 장난하는거 아니라구, 그때도 그
랬구 지금금도 난 할아버지 재산에 관심없어」

「형. 이게 무슨 뜻인 줄 알아?. 형지분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지분까지 있으면 이사회를 형
이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구」

「할 수 없잖아. 할아버지가 그렇게 결정하셨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재인이 까딱도 않하자 재선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 여자가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아?」

「안 궁금해.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아니까. 이런 일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구. 유언장이라는
처음 공개하셨을 때도 이러셨어」

「성회장님 딸 아니야. 」

「그것도 알아. 현주는 삼 년 전에 결혼했어」

어릴 적 친구이야기에 재인이 오랜만에 싱긋 웃었다. 그리고 흥분한 동생의 머리를 투닥거렸
다.

「걱정마 어차피 난 관심없었어. 그 재산 다 내놓은신대도 난 상관없는 일야. 난 지금도 충분
해 내 힘으로 일어설 수 있다구, 난 손해 볼게 없어.」

「형, 그 여자 형도 나도 모르는 사람이야. 아마 딴 사람들도 모를 거야. 형은 그 재산 욕심
안나겠지만 그 여자는 안그럴 거라구」

「그래서?」

재인은 전혀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집어들었다.

「그만하자.」

재인이 일어서자 재선이 붙들고 나섰다.

「다 듣고 가라구, 이직 중요한 얘기는 하지도 않았어」

「나랑 관계없다는 거 그냥 해본 말 아니야. 재선아.」

재인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삼 년 전에 난 형 선택이 옳다라고 생각했어. 그렇지만....이번은....」

재선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재인에게 무언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재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호텔문을 들어섰다. 제기랄, 제기랄.

진짜 제기랄이다. 이거야 원... 그는 욕을 해대며 걷느라 앞에 있는 여자를 미처 발견하지 못
하고 부딪혔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그가 얼른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어쨌든 그는 이 호텔로 먹고 사는 사람이고 이 여자는 고객
이다.

「괜찮아요? 」

곧 병원을 개원할 거라는 치과의사가 얼른 다현을 부축하고 나섰다.

「어... 아니요. 제가 잘 살피지 못했어요」

다현은 딴 생각을 하느라 앞의 사람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자신 때문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죄송합니다.」

그가 집어주는 핸드백을 손에 들고 빨개진 얼굴로 미소지었다.

돌체비타의 달콤한 향기가 코 끝에 맴돌았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모래가 손끝에서 나가는 거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마주친 사람도

언젠가 어떤 상황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될 줄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 옆에 있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전혀 알 수 없어도 앞으로 어느날 서로에게 어떤 의미
를 갖고 다가서는 존재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3

다현은 경은을 앞에 놓고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경은을 위해서 뭘 해줘야 할지 그녀는 방법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교사생활 사 년만에 가르
쳐본 영재였다. 아니 경은은 천재다.

놀라울 정도의 호기심과 폭발적인 지적 흡입력은 그가 세상에 하나 나올까 말까하는 대단한
아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한다.

그가 제대로 교육받고 양육받을 수 있다면 말이다. 대부분의 천재가 그렇듯이 경은도 학교생
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그 스스로 다 알고 있는걸 강요받는게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 다현도 잘 알
고 있다.

그에게 뭘 해주어야 할까. 생각 같아서는 유학보내는 게 가장 좋은 일이지만 외할머니 밑에서
자라고 있는 그의 환경으로는 불가능하다.

다현은 답답해지는 걸 느낀다. 어떤 방법이 있을텐데.

무력한 자신에 한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이경은. 또 미술시간에 코골고 잠들면 가만 안둬. 」

「그럼 코 안골고 자는 건 괜찮아요?」

경은은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그것도 안돼」

다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싱글거리고 웃고 있는 경은의 머리카락을 짓궂게 훑고는 고개를
들었다.

'후 잘생겼는데. 둘다. 저 나이에 학부모는 아닐테고 삼촌쯤 될라나.'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를 찾은 두 남자는 모두 짙은 색 양복에 깨끗한 외모와 호감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절 찾으신다구요, 제가 김다현입니다.」 그녀가 활짝 웃었다.

다현의 인사에 약간  키가 더 크고 나이 먹은 남자는 얼굴을 찌푸렸고 그보다는 어려 보이는
남자는 마주 웃었다.

'재미있네. 이 사람들은 빛과 그림자 같아. '

「무슨 일 때문이시지요? 학부모는 아니신거 같은데. 」

「좀 조용한 장소에서 얘기하고 싶은데요. 개인적인 문제거든요」

그녀는 그 말에 약간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는 중학교 학생들이 다니는 곳이지 이렇게 다 큰 남자들이 개인적인 문제로 조용한 장소
를 찾는 곳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들을 상담실로 안내했다.

문이 닫히자 학생들의 소란스러운 소음이 차단되었다.

「자, 앉으세요.」 그녀가 의자를 빼서 먼저 앉으며 권했다.

「음.  저는 이재선이라고 합니다.」 하며 좀 나이를 덜 먹은 쪽이 먼저 자기 소개를 했다.

유&이 로펌. 변호사 이재선.

그녀는 건네받은 명함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젊은 친구가 얼굴만 잘생긴게 아니라 머리도 좋네.

「그런데요.」

변호사가 도대체 왜 날 찾는거지?

그녀는 의아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이야기했다.

「혹시 이규철이라는 이름 들어보셨습니까? 」

잘생긴 변호사가 점잖게 물어왔다.

이규철이라....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우리반 애들 중에는 그런 애가 없는데... 혹시 다른 반 아닌가요?」

그녀는 아무래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쿡쿡..

한마디 말도 없이 인상만 긋던 남자가 웃음을 터뜨리자 젊은 변호사가 노려봤다. 그렇지만 그
의 입가에도 웃음이 새겨있었다.

「아, 아니지요, 당연히, 선생님 반 애들 얘기가 아닙니다. 이건」

「그럼요?」

무엇 때문에 왔냐는듯 그녀의 눈빛에는 의문이 가득 담겨있었다.

「혹시 성현그룹이라고 들어보셨나요?」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모르리라 생각하는 건 아닐테니까

「네. 물론이요」

반도체분야와 전자산업분야에 진출해 있는 그 그룹을 모르는 사람을 없을 일이다.

「그런데요?」

「거기 회장님이 이자 규자 철자 쓰십니다.」

변호사는 아이에게 이야기하듯 설명했다.

「아. 나도 알아요」

그녀는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신문경제면을 유심히 읽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정도 유명인사 이름정도는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다.

내가 궁금한 건 당신들이 왜 난 찾아온 건지가 궁금하다구.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
을 이야기하기 위해 날 찾지 않았을테구.

그녀는 아무말도 안하고 변호사라는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할지 기다렸다. 그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자 다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 때문에 절 찾으시는 거지요?. 그 얘길 해주시러 오신 건 아닐테구」

「물론 아닙니다. 제가 찾은 건...」

「당신이 어떻게 꼬리를 쳤는지 묻고 싶은 거요.」

여태 인상만 긋던 사람이 험하게 말을 이었다.

예기치 않은 공격에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4

「당신이 어떻게 꼬리를 쳤는지 묻고 싶은 거요.」

여태 인상만 긋던 사람이 험하게 말을 이었다. 예기치 않은 공격에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
다.

저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입는 편이 훨씬 더 근사하다.

「그런가요. 알겠어요.」

그녀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재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오? 」

「당신이 변호사와 함께 다니는 이유 말이에요. 그 고약한 말버릇 때문에 항상 문제가 되겠어
요. 당신은.」

총명한 눈빛에 노기를 담고 재인을 똑바로 직시한 젊은 여교사는 재선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변호사님이 말씀하시는 편이 낫겠군요.」

「아. 예 죄송합니다.」

재선은 분위기를 망쳐버린 사촌형을 잠시 노려본 후 서둘러 얘기를 꺼냈다.

「결론만 우선 말씀드리지요. 법률적인 자세한 문제는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재선은 고개를 들고 눈이 맑은 여선생을 직시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현그룹의 이규철 회장께서 김다현씨에게 재산을 상속하셨습니다. 」

「그럼 그분이 돌아가셨어요?.」

그 정도의 경제계 거물이 죽었다면 신문에 크게 났을텐데.

「안타깝게도 아직 정정하시오.」

말버릇 고약한 그가 다시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그녀의 질문에 막상 당황한 재선이 재빨리 형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

「유언장에 선생님 이름을 거론하셨습니다.」

「한재산 챙긴 거지... 」

말버릇 고약한 남자가 다시 끼어들었다.

다현을 그를 노려보고 입을 열었다.

아하. 이제 이유를 알겠다. 그녀는 속으로 짧은 한숨을 쉬었다.

「잠깐만요. 이제 무슨 뜻인지 알아 듣겠어요. 사람을 잘못 찾아오신거 같네요」

「네? 김다현 선생님 아니십니까?」

재선이 당황해하며 말했다.

「맞아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을 찾는게 확실해요.」

「아닙니다. 지금 앞에 계신 분이 이 서류의 김다현 선생님이라면 확실합니다.」

재선은 그녀에게 서류 위에 올려있는 그녀의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을 확인시켜 주었다.

다현은 자신의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을 발견하고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맞아요, 이건... 그렇지만 ... 」

그녀는 고개를 들고 변호사와 눈을 마주쳤다.

「그렇다면 맞습니다. 회장님은 김다현 선생님한테 몇 가지 조건을 거시고 회사권리의 일부분
을 상속하셨습니다. 물론 그분이 유고시의 이야기지만.」

「일부분이라구. 지금 우리회사 주식이 한주에 얼마나 되는지 알구나 하는 소리야, 그야말로
한재산 챙긴 거라구」

그가 다시 빈정거렸다. 그리고는 험악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했다.

「당신은 입좀 다물어요. 그러는 편이 훨씬 내가 이해하기 쉽겠어요.」

그녀는 재인을 향해 인상을 긋고 무시해버렸다.

「그 회장이라는 분이 내게 그걸 상속한게 확실하다는 얘긴가요. 지금」

「물론입니다.」 재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가 재인과 재산을 훑어봤다.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이 헛소리하게 생기지는 않았다.

그럼 날 상대로 사기를 치는 걸까. 월급쟁이 선생상대로 사기칠일도 없을텐데.

안그러면 왜 갑자기 이런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 걸까.

그녀는 맹세코 성현그룹은 커녕 그 가까이도 가본 적이 없다.

그녀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재선이 다시 확인하고 나섰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무슨 소린 줄 잘 모르겠군요. 난 그런 일하고는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요. 아무래도 무슨 착
오가 있는거 같아요.」

재선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착오는 무슨」

재인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지금 우리 회장을 모른다는 거요?  선생」

말버릇이 고약한 사람인줄 첨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훨씬 익숙해 있었고 그녀보다 나이 많은 학부모들에 깍듯한 존칭
으로 대접받아왔으므로 이 사람의 깔아 뭉개는 듯한 하대는

아주 맘에 안들었다.

「여태 딴데 있다 왔나요. 물론 나는 그 회장님을 알고 있어요. 」

당연히 알고 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대한민국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문제는 그 사람이 날 알고 있느냐지.

그녀의 말에 재인과 재선이 눈을 마주쳤다. 그러면 그렇지.

「당신이 그를 어떻게 꼬드겼는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지만 이 상황을 앞으로 어떻게 진행시
킬지 무척 궁금하군.」

재인이 그녀를 대놓고 비웃었다. 눈에 싸늘한 혐오를 간직한 채.

하지만 눈앞의 여선생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나랑은 반대군요. 난 그 회장인가 하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꼬드겼는지 무척 궁금해요. 하
지만 앞으로 진행될 상황은 충분히 알겠네요.」

그녀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마 앞으로 난 저 인간 목을 조를 것 같아. 안그러면 주먹을 휘두르겠지.

「그게 무슨 뜻이지?」

재인이 다현의 말에 펄쩍 뛰어 올랐다.

「난 당신같은 여자는 끔찍하다구.」

이 여선생이 혹시라도 나랑 결혼하겠다고 작정한 거 아니야. 어림도 없는 일이다.

「피차 일반이에요, 나도 당신같은 타입 끔찍해요. 그러니까 그만 소리지르고 입좀 닥쳐요.」

그녀의 조용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그를 제지했다.

한참 크는 시끄러운 사춘기 애들을 진정시키고 절제시키는 훈련이 그녀에겐 되어 있었고 그건 흥분한 다 큰 성인에게도 똑같은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엔 변호사인 재선도 찔금할 만큼의 냉정과 위엄이 서려있었다. 마치 법정위의 판사처럼.

재인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5

다현은 눈썹을 찌푸리고 약간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말 못알아 들으시는 모양인데 난 성현그룹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 그 이규철이라는 회
장도 몰라요.」

「당신이 금방 안다고 인정했잖소.」

재인이 그녀의 말 중간을 자르고 그녀가 한 말을 상기시켰다.

「당신은 우리나라 대통령 모르나요.」

그녀가 어린아이를 대하듯 불쑥 재인을 향해 물어보고는 그의 대답과 상관없이 말을 이었다.

「난 잘 알아요. 그렇지만 내가 그를 잘 안다고 그가 날 기억해 줄지는 의문이군요.」

그녀는 재인과 재선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옅은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다시 말하지만 난 당신들과 관계없는 사람이에요. 분명히 무언가 착오가 생긴 거라구요. 」

재인과 재선은 얼굴을 마주했다.

이 젊은 여선생은 진지하다. 그리고 솔직해 보인다.

그녀가 거짓을 얘기하고 있는 거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 망할 놈의 유언장은 도대체 어떻게 된거지.

이 유언장에 적혀 있는 모든 내용은 할아버지의 유고시에 법에 따라 정확하게 집행될거다.

저 여선생과 나의 의견과 상관없이.

「선생님은 관계없다고 하지만 제가 드린 말씀은 절대로 그냥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선생
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유언은 집행될 겁니다.

그리고  몇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선생님은 부호가 되시는 거지요. 」

이거야 원, 왜 내가 아니라는데 저렇게 우길까. 다현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 착오가 아니라는 건가요?」

「절대로 이건 착오도 실수도 아닙니다.」 재선이 다시 확인했다.

「내가 그분을 모르는 것도 착오나 실수가 아니에요. ...그분 건강하시나요?」

왜 돈이 산처럼 많은 부자들은 괴팍한 짓을 한다지 않아.

주민등록 생년월일을 복권 뽑듯이 뽑아서 찍었을 수도 있구, 아니면 내가 가르치는 애들 중에
하나가 그분이랑 알지도 모르지.

아니면 졸업생 중에 그 회사 들어간 애가 있나. 이제 교사생활 사 년째에 아직 그런 애들은
없을텐데.

그녀가 주저하듯이 묻자 그 험악한 사람 얼굴에 처음으로 진짜 미소 비슷한 것이 떠 올랐다.

「제정신이냐고 묻고 있는 거라면 대답은 예스요. 그 노인네는 아주 말짱해요. 」

행여라도 죽고 나서 소송날까봐 그것까지 완벽하게 해놓으실 정도로 할아버지는 말짱하다.

할아버지는 지금 저 여선생이 하는 얘기처럼 유언장 변경시 정신이 이상했다는 거로 무효소송
을 낼까봐 유언장에 병원진단서를 첨부해 놨을 정도로 용의주도하다.

「좋아요, 그럼 실수도 착오도 좋고 . 그래서요. 당신들이 내게 원하게 뭐지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다현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나마 당분간 집행되지도 않을 재산을 놓고 실갱
이를 한다는 자체가 피곤한 일이다.

그리고 현실로 믿기지도 않는 일이다. 아무래도 사기같은 얘기다.

다현의 이 질문은 재인과 재선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건 그들이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다.

뭔가 좀더 드라마틱하고 약간은 쇼킹한 연출을 기대했었는데...

보기보다 이 여선생은 냉정한가보다.

「에...음.. 그러니까 그 재산은....」 재선이 좀 더듬거렸다.

이 냉정한 여선생에게 저 험악한 형과의 무언가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한다 말인가.

0
「음... 그래서요?」

다현은 재선이 어서 이야기를 마쳐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음...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그 조건이 그렇게 말씀하시기 힘든 일인가요.」

「음... 」

재선은 말 꺼내기 어려워 계속 더듬거렸고 재인은 빙글거리고 웃고만 있었다.
「음... 김다현 선생님이... 음... 」

저 사람은 좋은 변호사는 못되겟군.

저렇게 뜸들이고 긴장해서야 어디 제대로 변론이나 하겠어.

다현은 얼굴을 약간 찌푸리고 맘속으로 변호사의 답답함에 한심해했다.

그리고 수업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거렸을 때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들
렸다.

「뭐라구요?」 다현이 고개를 홱 쳐들고 재인을 향했다.

재선은 어렵게 꺼낸 이야기를 다현이 다시 되묻자 한숨을 내쉬었다.

「이규철 회장님이 정해주신 남자분과 결혼하시게 되면 상속의 조건이 마무리가 됩니다. 물론
재산상의 권리를 행사하시는 방법은 더 세부적....」

「누구랑 결혼하라구요?.」

여태껏 눈도 깜박하지 않고 냉정함을 유지하던 여선생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가서 나오고
있었다.

「회장님이 우선 정해주신 분은 이재인씨입니다. 거부하시면 그 다음 번...」

「미쳤어요. 지금... 」

여선생이 눈이 동그래져서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지금 이 사람이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녀 입에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갔다. 그녀는 가끔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이상한 부
분이 있다. 지금도 그런 순간이다.

「그 이재인씨가 누구지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웬지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 고약한 사내와 눈이 마주친 다현은 자신의 직감이 맞았다는 생각
이 들었다. 저 사람이 그렇게 씩씩대는 이유가 있었군.

「정말 끔찍한 일이군요.」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피차일반이오. 자 어떻게 하실 거요. 선생.」

그녀의 창백해진 얼굴을 들여다보며 재인은 그녀가 했던 말을 되돌려 주었다.

「뭘 어떡해요? 」

뭘 어떡한다는 말인가. 생전 듣도 보던 못한 유언장 때문에 내 인생이 바뀔게 뭐란 말인가.

「당신 의견을 얘기해야 할 거 아니요. 졸지에 벼락부자가 됬으니 감개가 무량하시겠지만. 」

「말 조심해요. 난 당신처럼 함부로 할 말이 없어요.」

그녀가 빈정대는 그를 노려봤다.

흥. 유언장 내용을 듣고 나니까 할말이 없어지는 모양이군.

「이래도 우리 할아버지가 한 번도 못본 여자한테 회사를 남겼다고 아직도 주장할 셈이요.」

절대로 그럴 리 없다. 할아버지는 아주 질릴 정도로 노련하고 말짱한 분이다.

그 양반이 얼굴도 모르는 여자한테 이럴 리가 없다. 더구나 자신까지 덤으로 얹어서.

「우리 할아버지라니? 그럼 당신이 이규철이라는 분 손자예요?」

다현은 재인의 말이 의심스럽다는 듯 새삼 재인을 훑어봤다.

다현의 물음에 재선이 나섰다.

「이재인씨는 이규철 회장님의 직계 장손이십니다. 김다현 선생님과 결혼하시게...」

「어림없는 얘기야.」

「말도 안되요.」

재인과 다현이 동시에 재인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

다현은 재인과 얼굴을 마주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요. 적어도 한 가지는 의견이 같아서.」

「어쩔 생각이냐구 묻지 않소. 당신이 할아버지를 꼬실 때 결혼문제도 확실히 했어야지. 」

재인이 다현을 다그쳤다.

「난 당신 할아버지를 모른다구요.」

다현은 이를 악물고 한 단어 한 단어를 내뱉었다.

진짜로 이 인간을 팰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학교선생이라는 사람에게 폭력은 좋지 않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럼 생판 남한테 손자까지 맡길 분이라구 생각했다면 천만의 말씀이오.
우리 할아버지는 아주 말짱하신 분이라구.」

재인은 이 여선생을 믿지 않았다.

「당신한테 유감이지만 내 말은 사실이에요, 난 진짜 그분을 본적도 없다구요. 하지만 당신
할아버지는 진짜 말짱하신 모양이네요. 나라도 당신한테는 상속 안했어요.」

그녀가 생긋 웃으며 대꾸했다.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다. 도무지.

「이래서는 결론이 날 것 같지가 않네요. 난 여러분들이 뭘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재인과 재선을 향해 약간 고개를 내저었다.

감당할 수 없다는 표정과 불신의 감정을 가지고.

「내가 뭘 해드렸으면 좋겠어요. 결혼같은 끔찍한 얘기만 빼고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해드릴
용의가 있어요.

그리고 뭐 다행스럽게도 그분이 건강하게 생존해 계시다니까

유언같은게 집행될 것같지도 않구... 제 생각은 아무래도 무슨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 아
무튼 유언이고 주식이고 당신 마음대로들 하세요.」

그녀는 시계를 흘낏 쳐다봤다.

「미안하지만 더 얘길 할 수가 없네요. 10분 뒤에 수업이 있어요.」

일어서는 그녀가 옆을 스치자 희미하게 달콤한 향내가 재인의 코끝을 스쳤다.

6

「형 어떻게 생각해.」

재인의 운전하는 모습을 흘끗 바라보며 물었다.

「난 그 여자 안믿어.」

그런 맹랑한 여자를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아니야 그건 형이 틀렸어. 내 경험으로 볼 때 그 선생님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직업적인 직감뿐만 아니라도 그가 보기에 그 여선생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변호사가 된거야, 판사가 아니라.」

「형은 그럼 그게 쇼였다 말이야」

「쇼라?...」

아무리 색안경을 끼고 봐도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너 얘기를 다른 쪽에서 접근해 보라구. 그 여자는 모르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제쳐두고 이
얘기의 주인공부터 시작하자구.」

재인이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주인공이라면 형이랑 그 선생님이지.」

동생의 농담에 재인이 인상을 그었다.

「알았어. 할아버지부터 시작하자구.」

「너 그 양반이 생판 모르는 남남한테 본인 재산을 그것도 회사주식을 덜컥 손에 쥐어 주실
것 같아.」

재인의 목소리는 어림도 없다는 투다.

「어림도 없는 일이지.」

재인의 말에 재선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럼 얘기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그 여선생이 여우라는 얘기지.」 당연하다는 투다.

「아니야. 형 말대로라면 우리 할아버지가 그 여자한테 속았다는 말인데. 헤에, 절대 아닐걸.
그건.」

재선은 변호사다.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오류를 바로잡는 건 즐거운 일이다.

「끙 ... 그것도 그렇군」

우리 노인네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양반이 그런 새파란 젊은 여자한테 넘어가실 리가 없다.
제정신이 아닌 다음에야. 우리 노인네가 말짱한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재인을 교묘히 걸고 넘어간걸 보면.

누구보다 재인은 잘 알고 있다. 재인이 당신재산에 관심없는 걸 훤히 알고 있는 양반이고 무
엇보다 가족문제에 민감하다는 사실을 더더욱 잘 알고 있는 분이시다.

「일단 두목하고 한 번 얘기해 보자구」

재인은 어떻게든 할아버지의 결심을 바꿀 방법을 생각하며 말했다.

7

「할아버지 저한테 이러시는 거 처음 아니에요. 아무리 이러셔도 전 처음이랑 똑같다구요.」

재인이 할아버지를 마주하고 냉정하게 얘기했다.

「나도 너와 똑같다. 하지만 색시감은 바뀌었잖아.」

이규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지난 번과 절대 똑같지 않다. 지난번에 저 녀석은 내 얼굴을 보려고 들지도 않았다.

그는 결코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신부감이 누구든 저랑은 관계없어요.」

「아마 이번에 관계있을거다. 너도 잘 알텐데.」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에요?」 ]

그는 할아버지를 향해 인상을 그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게다.」

손주가 자신을 향해 인상을 긋고 있지만 그는 무시했다.

「할아버지 협박하지 마세요. 저한테 아주 어려서 그러셨어요.  할아버지 손자라는 이유만으
로 회사 넘볼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말라고.

그런데 이제 와서 주식에 여자까지 얹어가며 회사로 오라는 이유가 뭐예요.」

재인의 험악한 항변에 아랑곳하지 않고 깐깐한 그 노인네는 편안히 포도주를 홀짝였다.

그리고 손자의 물음에 옳은 일을 하고 있노라고 내심 생각했다.

재인은 그의 여러 손자 중에서 아니 그의 네 아들보다 더 훨씬 더 뛰어난 놈이다.

적절하게 대응하고 발빠르게 움직이는 순발력도 그렇고 저돌적인 추진력도 분석하고 예측해서
남들보다 한발쯤 앞서 나가는 그의 지도력도.

사업적인 본능은 타고난 녀석이다.

무엇보다 인정머리가 없다는 면에서는 그보다 한수 위다.

재인이 그의 핏줄이 아니었다면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족을 만들었을거다.

0그는 특별히 핏줄에 약한 사람이 아니다.

먼저 간 아들녀석 빼고 그의 아들 셋이 모두 경영과는 머리가 먼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그의 아들들에게 경영일선에서 발도 못붙이게 하는 것을 두고 그의 아
들들이 인심을 잃어서라고 생각들 하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그 녀석들은 사업에는 재주가 없는 놈들이다. 그 사실은 아들 녀석들도 그도 잘 알고 있다.

피붙이 중에는 사위녀석 한 사람과 손주녀석 몇만 SH에서 일하고 있다. 물론 그들에게 그럴만
한 능력이 없었다면 애시당초 SH근처에 있지도 못했을테다.

몇 만 명의 종업원이 그의 회사에서 일하며 그들에게 부양되고 있는 가족은 그의 몇 배다.

그들까지도 그이 책임일 수 있다. 단순히 운이 좋아 오너의 아들이나 손주로 태어난 이유하나
로 그 많은 사람의 생계를 담보로, 더 나아가서는

국가경제를 상대로 경영능력을 실험하는 짓은 미친 짓이다.

재벌세습이니 어쩌니 하면서 한 회사를 줄줄이 대를 이어가며 경영하는 짓은 위험 천만한 사
업방법이다. 더구나 그런 거창한 이유가 없더라도

그가 몇 십 년 땀흘려 일구어 놓은 모든 것을 능력도 안되는 자식놈이 망치는 꼴은 눈에 흙
이 들어가도 볼 수 없다.

그가 재인을 원하라는 것은 손주라서가 아니다. 그를 후계자로 키워놓기는 했지만 재인이 그
럴 인물이 아니었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테다. 사업도 사람장사다.

뛰어난 인물과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재인의 능력에다 다현의 올바른 사고방식과 특별함은 암만 생각해도 절묘한 조합이다.

그는 그의 선택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의 집안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

재인이 아무리 펄펄 뛰고 열을 내고 있을지라도.

「말조심해라. 협박이라니 할애비한테 그게 할 소리냐.」

그는 아주 느긋하게 손주를 타일렀다.

「다현이는 예의가 바른 아이야. 네가 그렇게 함부로 말을 하면 그 애가 할애비를 어떻게 보
겠냐 그 애를 실망시키지 말아라.」

「그렇게 맘에 드시면 할아버지가 결혼하시면 되잖아요.」

재인이 성질을 못이기고 소리를 질렀다.

8

「그렇게 맘에 드시면 할아버지가 결혼하시면 되잖아요.」

재인이 성질을 못이기고 소리를 질렀다.

「넌 네 할미가 보는 데서 용케 그런 소릴하는구나.」

할아버지의 차가운 말에 재인은 찔금하고 책상 위의 할머니 사진을 돌려놨다.

「이쯤에서 협상하자구요. 할아버지는 용케 제 약점을 찾으셨고 그렇다고 제가 순순히 할아버
지 제안에 달려들만큼 착한 놈도 아니에요. 그러니 여기서 해결하지요.」

규철은 씩 웃었다.

삼 년 전에는 완전히 내 제안을 무시하고 손톱만큼의 흥미도 보이지 않던 녀석이다. 그 길로
뛰쳐나가 저 혼자 살아보겠다고 넘겨받은 얼마 안되는 주식으로

호텔사업에 빠져버렸다.

머리는 정말 엄청 잘 돌아가는 놈이다.

우리 그룹 계열사중에서 오직 그 호텔만은 일찌감치 그룹에서 독립해있어서 내 영향력이 가장
적은 곳이다. 그 녀석은 그걸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일단 경영일선에 들어서자마자 SH 계열사끼리 관례처럼 묵인되고 있던 내부거래에서 완전하
게 발을 뺐다.

가끔 그 녀석이 하는 일을 보면 신기할 때가 있다.

운이 좋은 건지 실력이 좋은 건지 그 녀석은 어려운 일을 쉽게 풀어가는 재주가 있다.

지금도 궁금한 건 그날 그렇게 뛰쳐나갔을 때 마치 그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SH호텔에서 대
대적으로 선전해서 공채 한 그 시점이 과연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계획되었던 일이었는지.

그건 지금도 그가 모르는 일이다.

그저 짐작하자면 사채시장의 황금 손이라고 일컬어지는 윤후의 도움을 받았지 않았나하고 짐
작될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공채출신 전문인력이라도 그 어린녀석이 날름 그 대단한 자리에 오른 걸 보면
아마 그 녀석 자체의 검증되지 않은 능력보다는 그 녀석 뒤의

나를 믿었으리란 건 뻔한 노릇이다. 그 호텔 이사회가 바보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도
저 녀석은 내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생각할테지.

「난 너랑 장사하자는 게 아니야.」

그는 냉정한 눈빛으로 재인의 협상을 일언지하에 딱 잘라 거절했다.

「제가 보기엔 지금 할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틀림없이 거래에요.」

재인은 코웃음쳤다.

「현주는 성회장님 딸이었요. 반도체 주식이 덩굴채 들어올 판이었다구요.」

「넌 그걸 거절했어.」

저 녀석은 내가 고르고 골라 정해준 성회장 외동딸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때 저 녀석이
순순히 응했더라면 SH기전은 훨씬 흑자였을테구 반도체시장도

독점할 수 있었을텐데.

「현주는 가지고 올 주식이래도 있었어요. 근데 그 여선생은 아니라구요. 무슨 속셈으로 그
선생한테 투자하시는 거에요.」

그는 궁금했다. 저 노인네가 절대로 밑지는 장사를 할 일 없다.

「그 아이는 특별해. 」

할아버지가 아무리 재인과 사이가 안좋더라도 재인을 궁지에 몰기 위해 그를 걸고 넘어가지는
않을 노릇이다.

거기에 할아버지가 목숨처럼 여기는 회사를 함께 말이다.

그 새파란 여선생한테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저렇게 물고 넘어지는 거다. 그러니까 나까지 얽
어서 몰아붙이는게 아닌가.

그는 그게 궁금했다.

「다현이한테는 너나 나한테 없는게 있어. 」

「그녀의 사돈의 팔촌까지 다 뒤졌어요. 사놓은 땅은 좀 있지만 집 한 칸 지을 자리도 안된다
구요. 그것도 시골 구석자리에.

작은 아버진가 하는 사람이 사법부쪽에 있긴 하지만 정치권하구는 연결도 안되어 있어요. 우
리회사 그 비슷한 이름도 주식이라고는 눈 씻고 찾을 수 없다구요.

할아버지가 잘못 찍으신 거라구요.」

재인은 할아버지가 그런 실수를 하실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튼 집고 넘어갈 문제이
다.

「난 너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어. 네가 일일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난 내 손주며느리를 정
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설마 네가 날 무시하는 게냐.」

할아버지의 눈이 노기로 번득였고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재선은 서재 한구석에서 똑같은 색깔을 지닌 두 고집쟁이의 싸움을 지켜보고 어디쯤에서 끼어
들어 이 작은 전쟁을 마무리 지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저 할아버지 그만하세요. 형도 그만해.」

할아버지의 붉어진 얼굴을 보고 재선은 재인을 향해 진정하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 조용한 침묵 속에서 서로의 눈이 불꽃을 튀기고 있었고 재선은 작은 헛기침으로 그들의
시선을 돌렸다.

「...음...할아버지. 단순히 다현씨를 손주며느리로 원하는 거라면...」

재선은 약간 굳은 얼굴로 그의 할아버지를 직시했다.

「꼭 재인이 형이나 태하형이 아니어도 되잖아요?.」

할아버지와 재인의 눈빛이 재선에게로 모아졌다.

「다현씨랑 결혼하는거 제가 할께요.」

「안된다. 」

「안돼.」

재인과 할아버지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쏟아져 나왔다.

약간은 거칠고 그리고 아주 단호한 반대의사였다.

「절대 안돼.」

재인이 재선을 노려보며 경고했다.

「형」

「시끄러. 입 다물어」

그는 무시무시한 어조로 재선을 윽박지른 후 할아버지를 향했다.

「좋아요 할아버지가 이겼어요. 제가 한발 물러나지요.」

재인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결혼은 보류에요. 어차피 연분이라고 하는데 그녀가 나 쳐다보기도 싫다고 하면 어
쩔 수 없잖아요.」

「보류라... 어째 거래가 잘 이루어질 것 같지 않구나.」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리 할아버지라도 절 강제로 결혼시킬 수는 없어요. 전 그렇게 효자 아닙니다. 거기다
저 싫다는 여자랑 결혼할 생각은 꿈에도 없습니다. 」

「당연히 다현이가 널 싫다고 하겠지. 그래서 태하를 생각해 놓은 거야.」

그의 할아버지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태하는 회장의 외손주이고 재인의 고종 사촌이다.

태하의 얘기가 나오자 재인은 더더욱 이를 갈았다. 그리고 한발 물러섰다.

「시간을 두고 진지하게 만나겠어요. 원하시면 약혼까지는 하겠습니다. 그래서 적당하다고 생
각하면 결혼하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아니면 할 수 없어요. 할아버지도 저랑 사귀던 여자가 다른 손주랑 결혼하면
불편하실텐데요.」

재인은 할아버지가 이 정도에서 물러서길 바랬다.

또다시 태하의 이름을 내건다면 정말 결혼까지도 불사할 생각이다.

태하가 관리하고 그의 아버지가 이사로 있는 백화점은 틀림없이 그의 ...작은 어머니 재산이
다.

그걸 지금 차지하고 있다는 걸 생각만해도 그는 머리에 피가 치솟는다.

9

재인 입에서 드디어 약혼 얘기가 나왔다.

「안돼. 약혼은 안된다.」

얼씨구나 하고 달려들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반대하고 나섰다.

「좋아. 그냥 단순히 교제해라. 하지만 진지하게 잘 생각해라.」

그의 할아버지의 눈빛이 달라졌다.

재인의 의외의 제안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죠? 약혼쪽이 훨씬 더 마음 놓을실텐데요.」

재인이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 궁금한 어조로 물었다.

이건 정말 의외의 성과였다.

정말 재인은 결혼까지도 결심했었다.

물론 생판 모르는 그 맹랑한 여선생과 약혼은 질색이다.

약혼녀라고 달라붙는 것도 싫고 결혼 어쩌구 하면서 떠들어대는 것은 더더욱 싫다.

「너뿐만 아니라 우리집안의 문제야. 그냥 쉽게 보낼 아가씨가 아니라구. 놓친다면 틀림없이
후회한다.

날 속일 생각일랑 말아라. 죽어도 아니면 지금 손들어. 너말고 나한텐 손자들이 더 있어. 그
나마 네가 난 놈이라 생각하구 선택한거니까. 집안 일이라구 이건.」

할아버지의 진지한 어조에 재인은 눈썹을 치켜올랐다.

아무래도 뭔가 있는 모양이다. 다시 한 번 그녀의 집안을 뒤집어 봐야겠다.

할아버지가 집안을 걸고 넘어가실 정도면 그가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 틀림없이 있다.

「거기다 네녀석이 약혼한다면 주위에서 떠들어댈테고 그러면 다현이 그 애도 같이 오르내릴
거다. 그럼 네 말대로 다른 녀석과의 결혼까지도 어려워져.

거기다. 난 걔가 상처입는 거 원하지 않는다. 」

아무래도 이 노인네는 그 다현인지 하는 여선생을 진심으로 마음을 주고 있는 모양이다.

「약속해라. 다현이를 보호해. 기자들이나 세상으로부터. 네가 진심으로 책임질 생각이 없다
면 절대로 세상에 노출시킬 생각은 하지마.

만에 하나라도 그 애가 상처 받으면 절대 용서 안하겠다. 넌 내가 네 작은애미나 애비한테 한
일을 못잊은 모양이지만 그건 아무일도 아니었다는걸 보여주마.

다현이를 보호해. 」

할아버지가 무시무시한 어조로 그를 다그쳤다. 할아버지는 재인의 패를 들고 그의 패를 보여
주고 있다.

맙소사. 이 양반은 진심이시다.

「대답해. 이 녀석아. 절대로 그 애에게 상처주지 않겠다고. 」

「알았어요. 그럼 제가 최선을 다해도 그녀나 제쪽에서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번 유언장은
없었던 거에요. 그래야 저도 얻는게 있지요.」

「알았다. 그건 틀림없이 다시 고려하마. 」

「흠.. 6개월이에요. 6개월동안 진지하게 해보고 안되면 그건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
하세요. 」

「1년.」

그의 할아버지가 대꾸했다.

「8개월이요.」

「10개월이다. 다현일 설득시킬려면 10개월 가지구도 어림없어.」

「그녀는 지금도 형을 썩 좋아하지 않아요.」

재선이 조그만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할아버지만 맘 돌리면 모든 게 해결되는거다.

상황으로 봐서 할아버지가 다현이라는 선생한테 푹 빠져있을 뿐이니까 아마도 그녀가 싫다는
일은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재선과 재인의 눈이 마주쳤다.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당연히 네 고약한 형을 싫다고 했겠지. 그래서 1년도 부족하다는 게야. 다현이가 질색을 할
텐데. 네가 갤 설득하려면 시간 좀 필요할 게다.」

「저도 싫어요.」

재인이 소릴 질렀다.

「앞으로는 아마 그렇지 않을 게다.」

할아버지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날 속일 생각은 마라. 행여라도 엉뚱한 짓 하면서 세월 보낼 생각을 말란 얘기야. 그 애는
정말 특별한 애니까.」

「형. 그 성질 좀 죽여」재선이 서재문을 나서며 낮게 경고했다.

「한가한 소리마 머리가 돌게 생겼어.」

그의 서류상의 사촌형이 험악한 얼굴로 인상을 그었다.

「형... 그말 농담 아니야. 내가 다현씨 만날 수도 있다구.」 재선은 진지했다.

그의 형. 항상 빚을 지고 있는, 언제나 어른스럽고 가족의 짐을 대신 지고 살고 있는 그의 서
류상만의 사촌형. 그리고 그의 친형.

재선의 말에 재인의 얼굴은 더욱 험악해졌다.

「나도 농담 아냐. 장난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마.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구. 너까지 이러
면 어머...그의 작은 엄마 가슴아플 거야.

넌 네 뜻대로 살아. 행여래도 그런 얘기하지 말고 할아버지가 무슨 흉계를 꾸미실지 모르신다
고」

「하지만 형이 십자가를 질 필요는 없어.」

「너 혹시 그..김..다현인가 하는 선생한테 끌리는 거니?」

갑자기 재인이 고개를 돌려 재선을 바라봤다.

「아니, 그런건 아니구.」 그는 난데없는 질문에 당황해서 말끝을 흐렸다.

「아니면 됐어. 얘기 끝났다. 그만 하자.」

재인이 재선의 말을 막아버리고 결론을 지었다.

고집불통 같은 형같으니라구.

「형이 원한다면 아무것도 안할 수 있어. 방법은 있다구. 물론 재산을 남기는 할아버지에게도
할아버지 재산을 자유롭게 처리할 권리가 있지만

법은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에 우선해.... 할아버지의 다른 유언이 있더라도 어느 정도는 상
속재산을 보장하게 되어 있어.

형이 원하면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재선은 재인에게 걱정 말라는 표정으로 지우며 그에게 주어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설명했었
다.

하지만 재선도 알고 있다. 형은 아마 할아버지가 어떤 유언을 했던 그대로 지킬 사람이다.

애초부터 할아버지랑은 워낙에 성격이 똑같아서 맞지 않았고 그 많은 재산 필요없다고

뿌리치고 나간 사람이지만 가족문제가 달려있으면 가족을 감싸안기 위해 뭐든지 할 사람이란
걸 재선을 알고 있다.

10

얼음같은 이재인 실장이 오늘 또 사정없이 몰아대고 있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지금이 어느 땐데... 그건 내부거래란 소리 딱 듣기 좋
다구. SH기전이 뭘 바라는지 알게 뭐냐구.」

「하지만 실장님. 이건 회장님이 불랙콜로 직접 내리...」

「최부장. 당신은 오너 이름도 모르고 근무해요?. 소속이 어딘지도 모르고 있나 아직까지. 저
놈의 전화기부터 당장 떼어내.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 호텔은 SH기전하구는 아무 상관없다구.」

이재인 실장이 소리지르며 펄펄 뛰는데는 이번엔 확실히 타당한 이유가 있다.

최부장이 과잉충성을 하고 있었던 거다.

이회장이 SH 호텔을 노린다는 소문은 익히 아는 바다.

시대 흐름에 맞추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회사를 분리시켜 내놓기는 했지만 엄
청 아까와 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다.

호텔은 그야말로 실물이 교환되는 현금장사다. 특별히 캐시플로를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만
큼 남는 장사다.

거기다 사십대의 젊은 전문경영인의 치밀한 경영능력과 저돌적인 기조실장의 뛰어난 마케팅과
홍보능력은 호텔 SH를 정상으로 이끌었다.

세계 각 지역에 16개의 호텔체인을 가지고 있는 호텔 SH 에머럴드는 최상의 서비스와 최고의
시설로 세계정상 수준 중에서도 정상이었다.

「당장 전화기부터 떼버려. SH본사에서 뭐라구 그러던 알 바 아니라구. 어디다 지급보장이야.」

그는 열받은 표정으로 최부장을 닦달하고 나섰다.

「도대체 생각들이나 있는 사람들인지 모르겠군」

재인은 요즘 되는 일이 없는 거 같다.

밑에 직원들은 콩인지 팥인 줄도 구분 못하고 헤매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하루에 한 번 꼴로
그를 닦달하고 있으며.

집에서는 은근히 이기회에 회사로 돌아오기를 권하고 있다. 거기다 명색이 사촌인 태하의 움
직임도 심상치 않고 더더군다나 그의 ...작은 ...어머니는 몸이 안좋으시다.

이런 제기랄. 오늘은 아무래도 늦었고 내일은 인천에 내려가야 할 거 같다.

그 젊은 여선생과는 얘기할 필요가 있다. 재선도 말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연기가 아니었다.

애들 가르치는 사람이 그 정도로 연기를 잘 할 수는 없을거다. 배우가 아닌 이상에야.

그렇다면 더 복잡해진다.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한다 말인가.

살다보니 별 이상한 일도 다 있다. 그렇게 멀쩡하게 생긴 두 사람이 약간 정신나간 소리를 하고 사람을 놀리다니 ..

다현은 얼마 전 불쑥 찾아왔던 그 두 사람을 생각하고 고개를 저었다.

낮도깨비같던 그 일이 있은 후 벌써 일주일이 지났고 그녀의 세상은 아무일 없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 몇 일만 있으면 방학이다.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녀의 아이들을 무척 사랑한다. 그들에게 세상을 가르
치는 것도 즐겁고 그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는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그리고 방학은 그녀가 천직으로 알고 선택한 직업에 끼어있는 가장 큰 덤이다.

그녀는 원래가 자유롭고 낙천적이다. 학교선생이라는 보수성 강하고 예의바른 직업을 가진 얌
전해 보이는

다현이 얼마나 씩씩하고 적극적인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가끔은 그런 의외의 성격 때문에 스스로도 당혹해 하기는 하지만 그녀는 지난 이십육 년 동안
아주 교묘하게 적응해 나가는 법을 익혔다.

왜냐면 세상은 그들이 보고 싶어하는 부분만 보는 경향이 있으므로. 아마 앞으로도 쉽게 발각
날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학교 현관까지 나오다 얼굴을 찌푸렸다.

다현은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또 열쇠를 두고 나왔다.

이건 심각한 병이야. 김다현, 한 번도 곧장 나가는 법이 없다니까.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나이가 좀 지긋해 보이는 안경을 쓴 영락없는 학교선생같은 사람이 정중하게 재인을 향해 물
었다. 몇 명없는 교무실의 모든 시선이 재인을 향하는 것 같아

재인은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예. 김다현 선생님을 뵙으면 하는데요. 」

재인은 제법 큰 교무실을 둘러봤지만 그곳은 의외로 조용하고 한산했다.

「아. 방금 전에 퇴근하셨는데요. 오늘 방학식이 있어서.」

그 나이든 선생님이 창 너머로 다현을 찾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방학식. 그걸 잊었군. 그는 더욱 얼굴을 찌프렸다.

되는게 없군. 속으로 중얼거리고  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교무실을 나섰다.

어쩜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건 확실히 운명이다. 될 인연이 아니니까 ...

'할아버지. 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바쁜 시간에 여기까지 왔다구요. 그녀가 없는 건 내 잘
못이 아니에요. '

그는 골똘히 생각을 하며 현관을 나서다 들어오는 사람과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그는 호텔을 경영하는 사람답게 서비스정신이 몸에 배어 있었다.

달콤한 향내가 흐른다. 자신도 모르게 사과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다현을 생각해내려고 무지 노력했지만 그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해내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 또랑또랑 어조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삼켰다. '팔자로군.' 운명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11

그는 한숨을 삼켰다. '팔자로군.' 운명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서둘러 가는 그녀의 손목을을 잡아 그녀를 제지시키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어, 무슨 일이시지요?. 」

「김다현씨한테 볼일 있어 왔습니다. 」

이 여자가 날 기억할까 재인은 갑자기 궁금한 생각 들었다.

그녀가 약간 얼굴을 찡그리더니 생각해냈다.

「아, 그분이시군요. 그 변호사님이랑 같이 있던... 그런데 또 무슨 일이시지요?.」

이 여자는 재선을 기억하나보다. 내가 아니고. 이거야 정말 의외다.

보통 재선보다는 그를 주시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 이 여자는 아무래도 아닌가보다.

「네. 맞습니다. 중요한 일 때문에 다시 왔습니다.」

여선생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이 사람한테 좋은 기억라고는 별로 없다.

이 날 더운데 또 무슨 일 때문에 날 찾을까.

또 그 황당한 유산 얘기라면 정말이지 듣고 싶지 않다.

이 사람의 무례 때문에 또 열받는 일이 생기면 곤란하다.

그땐 아무래도 성질대로 해버릴지도 모르겠다.

「좋아요. 잠시 들어갔다 나올께요. 뭘 두고 왔거든요.」

다현은 열쇠를 또 두고 온 자신의 칠칠치 못함을 탓하며 그를 세워두고 교무실로 향했다.

다현은 송도의 한적한 전통찻집으로 그를 안내했다.

가야금 소리가 고풍스러운 실내에 어울리는 조용한 곳이었다. 그들은 아이스커피 두 잔을 나
란히 시키고 서로 얼굴을 마주했다.

「좋은 곳이로군요.」

재인은 주위를 둘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사람이 별로 없어서 자주 찾는 곳이에요. 자. 그럼 무엇 때문에 절 또 찾으셨는지요?.」

그녀는 보기만큼 성미가 급한 모양이다.

지나가는 인사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본론을 묻고 있다.

물론 나도 이편이 훨씬 편하다.

「우리 할아버지는 내가 당신과 결혼하길 원해요.」

재인도 우선 결론부터 먼저 꺼내들었다.

「거 참. 전 정말루 당신 할아버지를 몰라요.」

여선생은 단호했다.

이 집 식구들은 고집이 엄청 센가보다. 아무래도 사기같다. 사기칠 생각이라면 될 때까지 밀
어붙여야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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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 할아버지가 당신을 선택했으니까. 」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발언이네. 지금 왕비 간택하는 줄 아나.

「당신 할아버지는 당신이 알아서 해결해야지요. 집안일로 다른 사람 신세질 게 아니라.」

눈도 깜짝 안하고 여선생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누군 좋아서 하는 줄 아나. 나도 썩 좋아서 나서는게 아뇨... 그리고 이미 당신도 남이 아니라구. 할아버지 사정거리에 들어선 순간 그때부터

이미 당신은 할아버지 목표물이니까」

「이것 봐요. 난 모르는 사람이에요, 당신이나. 당신 할아버지나.」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 얘기했다.

다현은 지금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과 실갱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도 엄청 많다.

우선 경은을 어떡해야 할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 경은은 점점 학교생활고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의 집요한 결혼재촉도 점점 도를 지나치고 있다.

왜 이렇게 우리 엄마주위에는 결혼 안한 괜찮은 총각들이 많은 거냐구.  그녀는 맘 속으로 한숨을 쉬고 약간 부드러운 어조로 음성을 바꾸었다.

「내게 느닷없이 찾아와서 상속이네 결혼이네 얘기해도 난 절대로 전혀 모르는 일이에요.」

「하지만 당신도 관계있단 말이요.」

그가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아니요 난 상관 없어요. 난 상대로 사기칠 생각이 아니라면. 미안하지만 난 지금 당신이 하는 말이 정신나간 소리루 밖에 안들린다구요.」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 역시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지금 내 말을 의심하는 거요?」

재인은 기가 막혔다.

아직까지 재인의 말을 의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개인적으로나 업무적으로나.

그의 차가운 얼굴과 냉정한 어조는 우주선이 지금 문밖에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거 같은 신뢰와 의지가 배어있었고 그는 아주 어려서부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교육받아 왔다.

그런데 이 젊은 여선생이 그의 말을 지금 의심하고 있다.

「그럼 내가 뭐 때문에 당신 말을 믿어야 하나요? 」

그녀가 당당하게 고개를 바로 하고 물었다.

「사실 지금까지 바쁜 시간 내준 거만으로도 난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

사실이 그랬다.

그가 아무리 값비싼 양복을 입고 엄청난 차를 몰고 다녀도 내가 그를 믿어야 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다현이 타고 온 그의 차는 한국에서도 제일 비싸다는 차다. 그녀는 그런 차를 처음 타봤다.

아마 우리반 애들한테 얘기해주면 좋아하겠지. 하지만 그녀는 차 타는 순간까지도 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지금도 그렇다. 비록 초여름 호기심어린 시선이 오고 가는 학교에서 그와 얘기하기에는 여건이 좋지 않았고 그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기에는 그는 좀 -

아니 많이 부담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아주 이일을 확실히 하고자 따라 온건이지 그를 믿는다는 건 별개 문제였다.  그는 위험스러운 존재였다.

다현이 바쁘다는 소리에 이번에는 재인이 한숨을 쉴 차례였다.

바쁘다고?, 나보다 더 바쁠까.

12

「나도 무척 바쁜 사람이오」

「그렇지만 이건 당신 일에에요. 내 사정이 아니라.」

그녀가 싱긋 웃으며 지적했다.

「길가는 사람 붙들고 물어보라구요. 지금 이 상황이 정상적으로 들리는지」

「그럼 지금 나보고 미쳤다고 돌려 말하는 거요.」 재인이 기가 막혔다.

「글쎄요 」

그녀는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맙소사. 이 젊은 여선생은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나 보다.

「맹세코 난 정상이요.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도 아주 지극히 말짱하신 분이오.」

그녀는 그의 말에 그렇게 감격한 눈치는 아니었다.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후, 이 여선생은 확실히 보통 이상이다.

재인은 갑자기 이 말똥말똥한 여선생한테 흥미가 생겼다.

우리 할아버지가 최소한 뭘 보고 반한지는 알 것같다.

재인 앞에서 이만한 배짱을 가진 여자는 처음이다.

그녀는 그의 카리스마에 주눅들지도 않았고 잘난 신분에 흥분하지도 않았으며 엄청난 재산에 뭘 바라지도 않는다. 만약에 할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당당했다면

우리 노인네가 반할 만하다.   그는 빙긋 웃었다.

「우리 노인네 노망이든 변덕이든 이건 무시할 수 없는 일이고 당신이 믿기 어렵겠지만 그건 선생도 예외가 아니요.」

「선생님이요. 아니면 김다현씨든지요.」

다현이 부드럽게 호칭을 정정하고 나섰다.

「아직 나한테 대놓고 선생이라고 부른 사람은 없어서요. 교장선생님도 꼭 선생님이라고 부르지요.」

「좋소. 김다현씨.」

재인은 웬일인지 얼핏 터지는 웃음을 막고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내 말을 믿어요. 우리 할아버지가 그렇게 상속하신데는 뭔가 목적이 있어요. 그게 뭔지는 할아버지만 아시겠지만,

하지만 우리 둘이서 해결하지 않으면 아마 골치 아파질 거요.」

「왜요? 당신 역시 안 믿겠지만 난 그딴 거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해요.」

「아니 김다현씨. 당신도 지금쯤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믿기 시작했어」

「그런가요.」 그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거렸다.

재인은 그가 갖고 있는 모든 인내심을 다 동원해서 그녀에게 그와 그의 할아버지와 그 빌어먹을 유언장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쉽게. 최소한 간략하게.

그녀가 생각한 만큼 머리가 나쁜 여자가 아니라면 이정도로 얘기하며 충분히 알아들었을거다.

「당신 말은, 내가 제대로 들은 거라면 그러니까 SH그룹 회장님 유언장에 내 이름이 들어있고 그게 바로 쓸 수 있는 현금이나 뭐

그런게 아니라 단순히 회사 지분의 하나라구요,」

단순히 회사 지분이라구, 이 여자는 정말 난 미치게 하는군.

「대충 그래요.」

「그리고 그건 당신이랑 결혼해야만 얻을 수 있구요.」

「그렇소. 」

「결혼을 해도 배당금은 내 몫이지만 처분할 수도 없고 거기다 재산 행사는 오직 남편만이 할 수 있구요.」

「맞아요.」

「별루 재미있는 조건은 아니군요. 」

「뭐요. 우리회사 주식이 지금 한주에 얼마인줄 알고 나 하는 소리요. 당신이 재미없다는 배당금 일 년치는 당신학교 선생들 10년치 봉급을 합쳐도 안될 거요.」

「선생님이요.」 그녀가 다시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당신은 재산은 별 관심없는데 주식에 대한 재산행사만 필요하구요.」

「정확하오.」

「그럼 결국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네요.」

「뭐가 말이오.」

「이보세요. 난 지금도 경제적으로 자립해 있어요. 우리집이 당장 넘어가게 생긴 것도 아니고. 매일 밥을 굶는 것도 아니고. 당신가족의 그 복잡한 유산 없이도

난 아주 살고 있다는 얘기에요, 그런데 내가 뭐 하러 굳이 당신과 결혼을 하나요?. 그거 없어도 내 인생은 아주 괜찮은데.」

다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이 여자는 생각보다는 머리가 돌아가나 보다.

「당신 이름이 거기 올라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선생이랑 관계있어요.」

그녀가 말똥말똥한 눈동자를 굴렸다. 이 남자는 머리가 나쁜가보다.

「둘 중에 하나요. 선생님이든지 김다현씨든지.」

「김다현씨.」 재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언장에 올라간 순간부터 당신한테 문제가 발생한거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당신은 결혼만으로 갑부가 될 수 있는 상속녀가 되었다는 거요, 우리 할아버지는 당신이 이러리라 생각하고 당신과 결혼한 사람에게 발언권을 주었소.

무엇보다 당신이 갖게 되는 엄청난 주식의 발언력은 이사회를 장악하게 될텐데.」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동그래졌다.

「상속녀라니요 ?」

「아까 말하지 않았소. 할아버지가 나한테 주신 건 당신과 결혼할 수 있는 우선권뿐이오.」

재인이 다현의 얼굴쪽으로 고개를 드밀었다.

「물론 결혼으로 해서 당신이 손에 쥘 수 있는 현금도 어마어마하지, 아까도 말했지만. 그때도 당신이 지금처럼 관심이 없을지 의심스럽군.」

다현은 그가 말한 액수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교사봉급 10년치는 너무 거리감 없는 얘기지만 그가 말한 액수는 진짜로 어마어마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사회를 장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당신을 아마 주위에서 그냥 두진 않을 거요.」

「그게 무슨 얘기예요?.」

그녀의 얼굴표정은 가히 볼만했다.

「꿀에 벌이 꼬이듯이 주식이 있는 당신에게 날파리들이 몰려들 거란 얘기지. 뭐 그중에 한 사람 꼬여내는 것도 괜찮겠지만.」

「아마 그중에 한 사람이 당신은 아니겠지요.」

그녀가 표정하나 안바꾸고 살짝 어깨를 올렸다.

「당신 할아버지는 정말루 정정하시네요.」

그의 빈정거림에 다현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녀의 알쏭달쏭한 말에 재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고약한 성질을 커버해 주려면 당신 할아버지 재산만으로는 어림도 없겠어요. 그리고 보면 당신 할아버지는 현명하시네요.

그 많은 재산에 당신을 끼어 주실 생각을 다 하시고」

도대체 이 여선생은 하나도 지는 법이 없다.

「그래서 당신이 이렇게 날 붙들고 있는 이유가 뭔가요. 그 유산 때문에 나랑 결혼이라도 하자는 건가요?」

13

'결혼이라구?'

노려보는 재인을 무시하고 다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찻집의 음악이 가야금에서 바뀌어 있엇다, 흔히 듣지 않던 제목 모를 노래로.

「농담 말아요. 난 그럴 생각 꿈에도 없으니까.」 재인이 질색을 했다.

「다행이군요.」 그녀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거 아니요. 당신도 귀찮은 일 당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 할아버지 살아있을 때 그걸 막는게 우선일거요.

물론 당신이 아직도 그 유산에 관심이 없다면 말이지만.」

다현은 갑자기 유산에 대한 욕심이 마구마구 생긴다고 얘기하려다 꾹 참았다.

이 사람을 더 이상 약올리면 어쩐지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요?.」

「할아버지가 결혼에서 한 발짝 물러나셨소, 당신과 결혼을 전제로 한 진지한 교제를 하는 것으로. 지금 유언장을 보류하시고

10개월뒤에 다시 유언장을 작성하시는 것으로.」

「진지한 교제요?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할아버지 말에 의하면 속임수 없이 결혼을 전제로 한 진지한 교제. 아마 다른 사람들 하는거처럼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만나면 충분한 거라고 보는데. 」

진지한 교제라... 그녀는 심각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그래서 내가 얻는게 뭐지요?」

「뭐요? 여태 얘기했잖소. 당신이나 나나 이 소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건 이 방법뿐이라구.」

그는 급기야 소리를 질렀다.

「내게 소리 지르지 마요.」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단호하게 맞받아쳤다.

「내가 보기에는 당신쪽이 훨씬 유리한 거래같은데요. 당신은 날 만나는 대신에 재산이 그냥 굴러 들어오는 거잖아요,

당신 말대로 할아버지가 당신 골탕먹이려고 한 일이라면

10개월 진지한 교제 후에 화가 풀리실 거잖요. 난 그 대신에 남편이랑 재산을 포기하는 거구요.」

그녀는 재인의 험악한 인상에 까닥도 안하고 말을 이었다.

사무실에서 재인이 이런 인상으로 두어 번 윽박지르면 모두 질려서 입 열 생각들은 못하고 있는데 여기 앉아있는 학교 여선생에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나 보다.

「당신은 재산에 아무 관심도 없다고 했잖소.」

그가 노려보자 그 여선생은 방긋 웃을 뿐이다.

「알겠소, 행여래도 10개월뒤에 새로 작성한 유언장에서 당신 몫이 없다면 1년치 배당분만큼은 현금으로 손에 쥐게 해주겠소.

물론 그거야 우리 노인네가 죽은 뒤에 얘기지만」

재인이 이를 갈았다.

으이구 말버릇하군. 할아버지라는 분이 오래오래 사셔야겠군만.

「고마워요. 안믿겠지만 난 여전히 내 거 아닌 재산에 흥미없어요. 하지만 거래는 공평해야지요 」

그녀는 재인의 험악한 말에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겉으로는 생긋거리고 웃고 있었다.

「좋아. 원하는게 뭐야. 솔직히 얘기하자구. 상관없네, 관심없네 하면서 내숭 떨지 말고.」

그는 행여래도 결혼에 결자만 나와도 목을 졸라버릴 태세였다.

내가 자기처럼 성질드러운 사람을 남편감으로 생각한다고 착각하는 걸까.

「설득이요. 난 그냥 가만히 있어도 한 재산 챙길 수 있는데 뭐 때문에 내가 당신거래에 응해야 하는지 이성적으로 설명듣길 원해요. 」

그는 흥분해서 머리꼭지가 돌아갈 지경이지만 눈앞의 이 여선생은 아주 담담했다.

「당신에게도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요. 얘기한대로 어차피 주식배당금만큼은 내가 주기로 한 거구 당신주식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불순한 목적을 갖고 당신한테

접근할 뻔한 노릇인데. 그렇게 복잡한 거래보다는 내가 주는 현금 챙기는게 훨씬 쉬울 거요. 」

「그런가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그게 더 복잡한거 같은데요. 결혼만 내가 해버리면 현금 주는 거야 당신이 생색낼 필요는 없는 거구. 내주식에 꼬이는 사람들은 아마 나한테 엄청 잘할 걸요.

돈도 많고 주식도 내꺼구 거기다 남편까지 생기는데 내가 뭣 때문에 쉬운 길 놔두고 어려운 길로 돌아가요?. 」

그녀는 뱅글뱅글 웃었다.

14

그녀는 뱅글뱅글 웃었다.

이 여선생은 무언가 원하는게 있는거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 이렇게 얘기를 돌리고 있는 있는거다. 사업상 이런 식의 거래는 마지막 카드를 손에 쥔 사람이 이기는 거란 걸 누구보다 재인은 잘 알고 있다.

감히 이 새파란 여선생이 나를 상대로 그 수법을 써먹고 있는거다.

멍청, 아니 순진하다고 생각한 이 여선생은 아무 관심도 없는 척하면서 유언장에 명시된 어려운 법률적인 해석을 완전히 끝내버리고 그에게 카드를 감추고 있다.

협상의 대가라고 불리우는 이 이재인을 상대로.

기가 막힌 노릇이다. 이런 빌어먹을.

「좋아, 선생이 원하는게 뭐요. 미리 말해두겠는데 난 당신과 결혼은 안해. 」

「고마워요. 나도 그럴 생각은 없으니까」

「우선 첫 번째로... 」

「첫 번째라구? 원하는 게 한 가지가 아닌 건요?. 」

「우선 첫 번째로」

다현은 재인의 말을 무시했다.

「선생님 아니면 김다현씨. 벌써 세 번째 말하는 거에요. 그 정도는 쉽게 들어줄 수 있지요?.」

그녀가 빙긋 웃었다.

그녀의 표정은 머리 나쁜 아이를 대하듯 상냥하다.

이런, 제기랄

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다현씨.」

「좋아요. 우리 반에 경은이라는 학생이 있어요. 」

다현이 갑자기 대화의 주제를 바꾸자 재인은 얼굴을 약간 찌푸렸지만 그는 말을 자르지는 않았다.

「그림 그리는 거 싫어하는 거 빼놓고는 아주 완벽한 아이에요. 놀라운 지능지수를 지닌 특별한 아이지요.

지금은 할머니랑 단둘이 살지만 아마 그 애가 정상적으로 성장한다면 장담하지만 아마 세계의 어느 분야의 역사가 바뀔 거에요. 」

「그래서? 」

「난 그 애가 그런 사람으로 크길 원해요, 충분히 가능한 얘기고. 그 애는 지금 그 놀라운 지적 능력 때문에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어요.

난 누군가 그 앨 후원해주길 원해요. 가능하다면 그 애가 성장할 때까지. 」

「그리고? 」

「그리고? 그렇다면 난 당신이 원하는 어떤 조건에도 응하겠어요, 물론 당신 말대로 결혼은 빼구요. 」

「그거라면 당신 주식 배당금만으로도 충분할거요. 아까 가르쳐 주지 않았오. 주가가 왕창 폭락하지만 않는다면 당신 반 애들 모두다 후원할 수 있을 거요. 」

재인은 다현의 의도가 다분히 의심스러웠지만 그녀가 놓치고 있는 점을 지적했다.

「당신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는 정정하시다면서요. 경은이는 지금 한시가 급하다구요. 갠 낼 당장이라도 하버드로 보내도 될 애에요.

그리고 그 대단한 유언은 중간에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는 거구요. 지금이야 당신 할아버지가 무슨 생각이 들어서 날 거기다 집어넣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정신들어서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요. 」

그녀는 재인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 그의 할아버지가 맘을 바꿀 수도 있다는 - 대해서 조목조목 설명하고 나섰다.

「다시 잘 생각해봐요. 정말 관심없는지.」

「난 주식이
「좋아요. 그럼 계약서를 나 유산에 대해서 모른다니까요. 관심도 당연히 없구요. 믿거나 말거나지만. 경은을 위해 완벽한 후원을 해준다면 난

그 해괴한 모든 일에 대해서 당신에게 일임할 용의가 있어요. 」

그 젊은 여선생은 또박또박 아이를 가르치듯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있었다.

결코 농담이나 장난으로는 볼 수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는 이 여선생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무슨 다른 계략이 있는 건지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가 않다.

「좋아. 그 유언이 중간에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어쨋거나 난 그 학생의 확실한 후원자가 될 거요. 」

작성할까요?.」

「뭐라구? 」

「당신 말을 어떻게 전부 믿어요?. 우린 거래를 했고 확실하게 서면으로 계약을 하지요. 당신도 그러고 싶잖아요, 날 안믿잖아요. 」

나도 전혀 당신을 믿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 젊은 여선생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이야기했다.

사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다.

그는 아직 그녀를 믿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믿을 수 없으리라.

일이 잘못 되서 중간에라도 할아버지의 유언장이 공개되어 태하가 눈에 불을 키고 다현한테 접근한다면 참지 못하리라.

이 여선생은 이미 그가 점찍었고 그의 여자였다.

태하가 같은 녀석에 넘겨주다는 건 말도 안된다.

...작은... 어머니의 재산이 되어야 할 백화점을 가로챈 고모부도 용서할 수 없고, 사사건건이 그와 부딪히고 있는 고종사촌이라는 관계인

고모부의 아들인 태하도 맘에 안들긴 마찬가지다.

아마 유언장 내용을 알고 나면 고모부라는 사람은 펄펄 뛸테고 태하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다현에게 접근하리라. 태하 그 녀석은 아마 물불 안가리고

다현을 꼬여내리라는 건 안봐도 훤하다.

그럼 할아버지의 재산은 고스란히 그 녀석 손에 들어갈테고 안그래도 소외받고 있는 그의 작은...아버지나 작은... 어머니는 상처받으리라.

젠장 왜 작은 ...어머니의 재산까지도 보장하지 않으시냐 말이다. 할아버지는 이번엔 제대로 찔러오셨다. 젠장맞을.

「좋소. 서면으로 합시다. 우리.」

「그럼요. 나중에 내 이름이 상속자 명단에 없더라도 오늘 거래만은 잊지 마세요.」

「거래한거요. 」

「그래요 공정하게. 10개월간 진지하게 만나지요 뭐, 우리. 」

씩 웃으며 일어서던 그녀가 갑자기 미안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아참. 굉장히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구요?」

재인은 기가 막혔다.

15

「다다야. 얘. 그쪽에서는 토요일날 보자는구나. 」

「엄마 일요일엔 안된대?」

토요일날은 이재인이라는 남자와 약속이 되어 있다.

엄마에게 남자 얘길 했다가는 당장에 웨딩드레스를 사러가야 할테고 아마 재인은 그 날로 집에 인사를 올려야 될거다.

「그 사람이 일요일날은 출장간더라, 뭐 영국을 간다나. 너 방학이라 일요일날 한가하잖니 ?」

엄마는 기대감을 갖고 다현을 주시했다.

결혼 안한 남자들이 이세상엔 너무 많다.

엄마가 권하는 사람을 대충만 걸러도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선을 봐야 한다. 이핑계 저핑계 피해가기는 하지만 너무 완강한 거절은 엄마의 독촉을

더 심하게 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요령껏 행동하는게 중요하다.  이번 남자는 아무래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다는 예상이 든다.

토요일이라. 이재인과의 첫 번째 약속이 있는 날이다.

좋았어. 쉽게 하자구.

「알았어. 엄마」 그녀가 관심있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준현은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또 걸려들었다. 누나의 수법에. 정말 걱정되는 누나다.

「그럼 엄마 일요일날 출장갈 정도로 바쁜 사람이면 토요일날 내가 올라가지 뭐. 저녁보다 낮에 만나는게 더 좋을 거 같은데. 밤에 잘 안보이잖아. 조명발 때문에.」

누나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여우가 따로 없다니까.

「그럼 그럴래.」

엄마는 생각해보는 눈치지만 이미 결론은 누나가 의도한대로 나 있는 게임이다. 엄마만 그걸 모르지.

「그게 좋을 거 같아 어차피 뭐 방학이라 집에 있는데 뭐. 제대로 볼래면 아무래도 낮이 더 좋겠지? 그치 엄마. 」

그녀가 진지하게 웃으며 엄마의 동의를 구했다.

「그래 니가 올라갔다 저녁에 그 사람이 바래다주면 딱 좋겠다. 」

그녀는 딸의 반응에 기분이 좋아져서 얼른 동의했다.

「근데 또 뭘 입고 가나? 있는 집안이래니까 대충하고 가면 안되겠지. 무시할거 아니야?.」

「얘는 누가 선생님을 무시하니. 요새 신랑감들은 교사를 제일 좋아한댄다. 그래도 첫인상이 중요하니까 여름 옷 한 벌 사자.」

「엄마가 사줄꺼지?」

다현이 활짝 웃고는 준현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이제 얼마나 많이 매출을 올렸나 보다 얼마나 많이 이익이 남았나가 중요하다구. 지금은 캐시플로 중심으로 경영전략이 바뀌었어.

기조실 과장쯤 되는 사람이 아직도 상황파악을 못해. 처음부터 다른 관점에서 다시 시작하자구. 」

그는 결재서류를 던져주고 험악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재인은 인상을 있는대로 박박 긋고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계획적이든 정략적이든 어쨌거나 이건 처음 데이트다.

그는 그의 할아버지에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고 그녀와 공정한 거래를 했다.  그나마 고마운 건 그녀가 인천까지 데리러 오라고 하거나

그곳으로 내려오라고 하지 않고 순순히 그가 있는 호텔로 오겠다고 한일이다.

하지만 그녀와의 약속을 위해 그가 라운지로 내려갔을 때는 그녀는 없었고 한 오 분 정도 지나서야 허둥지둥 그녀가 나타났다.

재인은 좀 난감하다. 저 김다현이라는 여선생과 뭘 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할 수 있는 일에 그는 능숙한 편이지만 저 똘망똘망한 애들처럼 생긴 여선생은 아무리 봐도  여자로 보이질 않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판 남인 그녀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당황스럽다.

젠장. 아무튼 오늘 저녁 음악회에는 틀림없이 참석해야 하니까 오늘하루는 거길 가면 해결되겠지.

「미안합니다. 제가 좀 늦었지요.」

그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괜찮아요. 고작 몇 분이구 나도 온지 얼마 안됐으니까.」

그는 최대한 관대한 표정으로 그녀가 자리에 앉는 걸 지켜보았다.

「제가 방향치라서요. 길눈이 엄청 어둡거든요.」

그녀는 시원한 냉방이 되고 있는 커피숖안에서도 덥다는 듯 손부채를 했다.

똘똘하게 생긴 눈망울로 변명이 독특하다.

「상관없어요. 난 다현씨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그러는데 오늘 우리 뭘 했으면 좋겠어요. 」

그녀가 앞에 놓은 오렌지 쥬스를 마시다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뭘 할까요?.」

「우선은 난 오늘 저녁때 음악회를 참석해야 하거든... 거기 갔으면 좋겠는데」

다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람은 정말로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군.

「음악회요?」 그녀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지만 재인은 미처 보지 못했다.

「우리 호텔이 후원하는 문화행사요. 」

거기가면 할아버지 측근들을 볼 수 있을테고 재인이 어떤 여자랑 둘이 왔다고 하면 곧바로 그 정보는 할아버지 귀에 들어갈테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재인이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안심하리라. 재인은 그걸 노리고 있었다.

「음악회라...」 그녀는 약간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활짝 웃어 보였다.

「그보다 난 배가 고파요. 우리 밥먹으러 가요. 」

재인은 잘못 들었나 싶어 그녀를 응시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아직 다섯시밖에 안됬는데 ... 」

그가 흘금 시계를 쳐다봤다.

「그래도 난 배고파 죽겠어요.」

「그럼 간단히 요기하고 음악회 끝나고 저녁 먹읍시다. 」

무슨 여자가 오자마자 배고프다고 하나 원.

「음악회는 조금 있다 걱정하자구요. 난 배고프면 신경질 내는 타입이에요. 밥 먹고 나서 생각하자구요」

「좋아, 뭘 먹을까.」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조금 시장끼를 느끼고 있었다.

「삼겹살.」

그녀는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불쑥 내뱉었다.

삼결살? 맙소사 이 여자는 진짜 이재인에게 관심이 없는 여자로군.

처음 데이트라고 할 수 있는 오늘 먹고 싶은게 삽결살이라고.

진짜 그게 먹고 싶어도 참아야지. 이 날 더운데 여자가 내 앞에서 입을 쫙 벌리고 삼겹살을 먹겠다고.
그는 기가 막혔지만 다현이 원하는 곳으로 향했다.

재인이 다현을 안내한 곳은 깨끗하고 정갈한 실내분위기와 고급스러운 내부로 꾸며 있는 무슨 한정식 집 같아 보였다.

이 남자는 삼겹살도 고급만 찾는구만. 경험상 이런데 가격만 비싸지 별로 맛이 없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16

재인은 겉으로는 호리호리해 보이는 다현이 주저앉아 먹는 모습에 놀랐다.  그녀는 말 그대로 음식을 초토화 시키고 있었다.

처음부터 특별히 그를 의식하지 않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이거야말로 의외였다.

내숭이라던가. 얌전이라던가 아는 말은 그녀 사전에는 없는 모양이다. 이제껏 그가 만나온 여자 중에 삼결살을 같이 먹어본 여자는 없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만난 여자들과 이런 곳은 처음이고 내 앞에서 저렇게 씩씩하게 밥을 먹는 여자도 처음인 것 같다.

「원래 이렇게 잘 먹어요?」

말도 않고 열심히 먹던 다현이 서둘러 음식을 눌러 삼키는 모습은 생각만큼 보기 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습은 그녀를 아주 배고픈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했다.

「먹는 걸 좋아해요. 하지만 오늘은 좀 심한 거에요. 평소엔 이 정도는 아니에요.」

그녀는 약간 쑥스럽다는 씩 웃었다.

「아침 점심을 다 굶었거든요.」

「아니 뭐하느라 밥도 못먹고 다닙니까? 」

「아침에 늦게 일어났어요. 점심은 바빠서요.」

그녀는 간단히 설명하고는 열심히 고기를 올려놨다.

「아침은 이해할 수 있지만 학교도 안나가면서 뭐가 그리 바쁜가?」

「두 시에 만난 사람을 다섯시에 보낼려고 해봐요. 바쁘지.」

그녀는 먹느라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럼 이전에 약속 있었습니까? 」

그는 얼굴을 찌프렸다.

「물론이지요. 인천 사람한텐 서울 올라오는 게 일이거든요. 올라올 때 한꺼번에 처리해야지요. 」

'처리한다고' 그녀는 오늘 나랑 만나는 것도 다른 일과 한꺼번에 처리해야 할 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건가. 재인은 정말 기가 막혔다.

천하의 이재인이 이렇게 취급받기는 정말이지 처음이다.

「그럼 그 만난 분도 다섯시에 약속 있는거 알아요?」

「당연하지요. 안그러면 무슨 수로 보냈겠어요. 그냥 아무 말없이 보내면 실례지요.」

「순순히 좋아하던가요?」

그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녀가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좋구 말구가 어딨어요. 그 사람한텐 결정권이 없는데. 」

그녀는 부드럽게 말하고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뭐가 궁금하세요?.」

「아니 그 사람도 우리 일을 알까 싶어서. 」

그녀의 정곡을 찌른 질문에 재인은 눈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쪽 여자친구도 나에 대해서 아나요? 」그녀가 지적했다.

역시 남자군 그래. 그럼 저 말쑥한 옷차림은 나를 위한게 아니었군.

짙은 진홍색의 꽃무늬 원피스에 흰자켓은 걸친 그녀의 모습은 상큼해 보였다. 그리고 시원하게 틀어올린 머리는 아주 얌전하게 전문가의 손길로 셋팅되어 있었다.

학교에서 보았던 얌전하고 정숙한 여선생과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였고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지금 다른 남자를 만나고 왔다고 얘기하는 거요?.」

그는 좀 약이 올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남자라... 」

그녀는 먹는 걸 중단하고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얘기라면 내가 무슨 불륜이라도 저지른 것 같군요. 어감은 좀 이상하지만 그래요.」

그녀가 순순히 인정했다.

「난 당신이 이중 풀레이를 할 사람이라고는 보지 않았는데」

그는 내색하려 하지 많았지만 그의 어조에는 불쾌한 기색이 드러나 있었다.

「분명히 하자구요. 당신은 당신 할아버지를 위해 날 만나요. 난 우리 엄마를 위해 그 사람을 만난다구요. 」

「당신 말대로 분명히 하자구. 날 만나는데는 다현씨 자신을 위해서기도 하다구. 당신도 공짜는 아니니까」

그가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속으로는 성질을 죽이느라 애쓰면서.

「물론이지요. 하지만 우리엄마를 위해 만나는 그 사람한테도 난 얻는게 있어요. 」

그럼 괜찮은 식사와 옷 한 벌. 아쉽게도 이번에는 밥을 못먹기는 했지만.

「그리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난 당신 여자 친구를 이번 거래에 개입시키지 않았다구요. 」

그는 약이 올랐지만 논리정연한 여선생의 말에 할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남자를 만나면서 얻는게 뭘까 궁금했다. 그는 어쩐지 밑지는 장사를 하는 거 같다. 이 여자는 사업을 해도 아주 잘 할거다. 확실한 소질이 보인다.

「우리 할아버지가 알면 틀림없이 내게 뭐라 그럴 거요. 」

그는 이 문제의 시작인 할아버지를 거론했다.

「아닐걸요. 당신 할아버지가 당신이 말한 반만큼이라도 대단하시다면 내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실 거에요.」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재인은 영 개운치 않았다.

「하지만 당신은 뭔가 내게 말 안한 게 있다구.」

그가 인상을 썼다.

그러자 밥먹느라 눈을 아래로 감아 뜨고 있던 그녀가 반짝거리는 모습으로 그를 직시했다.

그 짙은 눈빛으로 아주 똑바르게.

「그건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요. 」

그녀는 살랑거리고 웃고 있기는 하지만 마치 날카로운 비수처럼 예리했다.

그녀는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다.

「당신이 내게 100% 정직하다구 말하지 마요. 믿지 않을테니까요. 당신은 당신대로 실리를 챙기세요. 난 나대로 그럴테니.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어요. 」

그녀는 조금도 흥분하거나 짜증내지 않았다. 오히려 봄날의 꽃처럼 방긋거렸다.

재인은 한방 먹었다는 생각을 하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17

「식사 다했으면 가자구.」

재인은 다현이 후식으로 나온 맑은 수정과를 마시는 걸 지켜보며 재촉했다.

「어딜요? 」그녀는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어디라니? 음악회 가기로 했잖소. 벌써 여섯시 이십 분이오. 일곱시부터 시작이니까 지금은 일어나야 해. 」

그가 시계를 쳐다보며 그녀를 재촉했지만 그녀는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은 않고 말똥말똥 그를 응시했다.

「거기 정말 가야해요?. 」

「무슨 말이오?. 그게.」

그는 일어서려다 말고 그녀의 곤혹스러운 표정에 도로 주저 앉았다.

「무슨 문제 있어요?. 」

「음.. 난 영 음악회 체질이 아니라서요.」

그녀가 작게 고백했다.

「난 그쪽은 정말 취미없어요.」 그녀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난 좀 예민한 타입이기는 해도 잠들기 위해서 한 장에 십만원씩 하는 표가 필요하지 않다구요. 」

급기야 재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잘려고 음악회 가는 게 아니오. 」

이 여잔 정말 할 수 없다.

「그게 문제지요. 난 클래식 음악회는 이십 분이 한계라구요. 거기다 엄청 먹었겠다. 아마 또 거긴 무지 시원할 거라구요.」

그녀는 이제 절망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또다시 웃음이 터지는걸 꾹참고 애써 진지한 얼굴을 하려고 노력했다.

「난 당신이 원하는 걸 먹었으니까 당신도 내가 원하는걸 들어야지. 그래야 당신 말대로 공평하지 않겠소.」

「그건 아니지요. 삼겹살 먹는 걸 좋아했잖아요, 하지만 난 그 고상한 음악 듣는 걸 원치 않아요. 」

재인이 더 이상 아무말 않고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고 단념했다. 「난 재인씨한테 분명히 경고했어요,0

하지만 혹시래도 내가 코를 골게 되면 그러면 날 흔드세요. 」

재인은 다현의 입에서 처음 나온 자기이름이 맘에 들었다. 하루종일 심사를 꼬이게 한 그녀가 처음으로 맘에 드는 소리를 했다. 차츰 나아질지도 몰라.

재인은 싱긋 웃으며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다행히 다현은 두 시간 내내 잠들지 않고 깨어 있었다. 그건 정말 강력한 의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지만 다행히도 한여름밤의 꿈이라는 부제가 달린 그 음악회는

그나마 다현이 좋아는 소품들도 몇 개 섞여 있었다. 다현은 음악회 중간중간마다 그녀에게 시선을 주는 재인을 보고 미소지었다.

「생각보다 지루해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

재인이 다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모르고 하는 소리에요. 이십 분은 들을만 했고 그후 이십 분은 딴생각을 했어요. 또 이십 분은 이를 악물었구요.」

「그러면 나머지 시간은?」 재인은 궁금했다.

「난 눈뜨고도 잘 자거든요.」

다현이 비밀을 얘기하듯 속닥거리자 재인은 약간 고개를 숙이고 쿡쿡거렸다.

「앞으로 참고하겠소」

「될 수 있으면 음악회 체질이 아니란걸 참고해주셨으면 좋겠어요. 」

「그것도 잊지 않겠소.」

재인의 입가에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재인과 못보던 여자의 모습의 귀빈석에 초대받은 몇몇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특히 재인이 기분좋은 모습으로 그녀에게 뭐라고 속삭이며 웃는 모습은 더더욱.

18

「지금 몇 시지요.」

차에 오른 다현이 두리번거리며 시계를 찾았다.

「아홉시 삼십 분이 안됐어. 아직 많이 늦지 않았어.」

재인의 계속되는 자연스러운 반말에 다현은 움찔했지만 이번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였다.

「나도 알아요. 하지만 오늘은 아니에요. 어째서 아까도 얘기했잖아요. 두 시에 약속이 있었다구. 우리엄마는 지금까지 그 사람이랑 같이 있을거라구 생각하실거에요」

엄마가 착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서는 절대 안된다.

「밤늦게 까지 같이 있기에 위험한 사람이었오. 그가? 」

「아니요. 나도 그건 잘몰라요. 하지만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지금까지 안들어오는 다현을 두고 엄마는 아마 결혼식날 입을 옷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녁때 약속있다고 얘길 했어야 하는건데.

「그럼 전화를 해요. 걱정하시지 않게」

재인은 다현의 걱정을 잘못 이해하고 선뜻 핸드폰을 내주었다.

그녀는 말끄러미 핸드폰을 쳐다보다 받아들였다.

어쩌면 전화를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핸드폰 쓰는 방법을 잘 모른다. 핸드폰이 없는 대한민국 유일한 별종이라고 현진과 친구들이 마구 놀려대도 그녀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우선은 필요도 없고 그안에 익혀야 할  내용들이 너무 머리 아파 핸드폰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고마워요.」 그녀는 전화기를 받아들였다.

「여보세요. ...응. 엄마 다다..... 아니... 그게 아니고...아니라니까.」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게 아니고 저녁때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응...그 사람이랑은 저녁전에 헤어졌어... 응...지금 가는길이라구... 걱정하지 말아요...어, 아냐. 친구가 데려다주고 있어....

응 ....집에서 가서 얘기할게 ....알았어요. 끊어요.」

「다다가 누구요 ?」

재인은 다현이 주는 전화기를 받아들고는 물었다.

「남의 전화를 엿듣는 건 그리 썩 좋은 매너가 아니에요. 」

「한 차 안에서 하는 얘길 다들었으면서 못들은 척 하는게 더 위선적이오 내 생각엔. 당신이 다다요 ?」

그가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며 말했다.

「예. 내가 다다에요. 집에서는 다현이라고 안해요. 모두들 다다라고 하지」

「왜 다다요? 그게 무슨 뜻이지?」

「준현이..우리 막내가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말을 좀 더듬었어요. 어린녀석이 내가 만만해 보였는지 나만 쫓아다녔는데 다현이 누나라고 몇 번 가르쳐줘도

제대로 발음이 안되는 거에요. 걔 입에서 타협한게 다다였어요. 그래서 다들 다다라고 불러요. 그때부터. 준현이가 딴이름으로 부르면 울어재꼈거든요.」

「다다라... 그것도 어울리는데」

「워낙에 제가 한미모하니까 뭘 붙이면 안 어울리겠어요.」

그녀가 새침하게 말했다.

쿡.

재인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하나 물어봐도 되요?」

「뭐가 궁금하신데. 」

그는 빨간 신호등에 차를 세우고 그녀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몇 살이에요 ?. 지금.」

그녀의 눈빛이 어두운 차안에서 반짝거렸다.

「우리 둘 그래도 진지한 교제인데 나이 정도는 알아야지요.」

다현의 말에 재인이 순순히 수긍했다.

「서른 둘.」

「서른 둘이면 나랑은 여섯 살 차이군요. 그 정도면 극복할 수 있는 나이에요.」

「뭘 극복할만한데.」

재인이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결혼하기엔 나이가 좀 차이가 나도 내 정신능력으로는 그나마 커버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여섯 살이면 딱 적당한 거요.」

다현의 말에 재인이 발끈해서 우겼다.

「많지요. 솔직히, 그렇지만 걱정 말아요. 우리는 결혼하기로 한게 아니라 진지하게 만나기로 한거니까」

그녀는 생글거리며 재인을 달랬다.

재인은 또 이 나이어린 여선생한테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는 차안의 CD를 작동시켰다. 에어콘이 시원한 차에 부드러운

피아노 음악이 흘러 나오자 다현의 큰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현을 흘끗 바라보고 곧 음악을 중지시켰다.

「어, 미안해. 음악체질이 아니라는데. 그만 깜박 잊었어. 습관이 돼서」

그가 변명을 하자 다현이 쿡쿡거렸다.

「난 날재우려고 흑심품은 줄 알았지요」

「아니오. 절대 그런 생각은... 」

재인은 황급히 변명을 하려다 그녀의 농담을 알아차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음악은 좋아해요. 다만 음악회 체질이 아니라는 거지. 」

「근데 재인씨는 클래식을 엄청 좋아하나봐요. 쇼팽을 아까 듣고 또 듣는거 보면,」

「어. 이음악을 알아. 」

조금전에 켰다 끈곡은 쇼팽의 피아노곡이다. 음악이라면 질색이라던 이여선생이  그 음악을 알고 있다.  말하고 있는 만큼 문외한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게 놀란 눈빛으로 보지 말아요. 사람들은 원래 취약한 부분에 더 신경을 쓰게 되있어요. 덕분에 우리반 애들은 클래식 귀신이 됐지만. 」

「당신반 애들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요.」

「난 정말 음악에 대해서 꽝이거든요. 특히 클래식은 더해요. TV에서 CF에 나오는 배경음악이 있었는데 그렇게 많이 들어도 제목을 기억못하겠드라구요,

동생이 두 손 들었다는 거 아니에요. 」

「무슨 곡이었는데. 」

「슈베르트의 숭어요. 커피광고였는데 준현이가 아마 한 열 번은 가르쳐 줬을걸요. 저 음악이 바로 숭어라고. 그 광고 나올 때마다 '누나 저게 뭐라고?' 하고 묻는데

생각이 안나는 거에요. 무슨 생선이름인거는 확실한데...」

그녀는 절망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붕어밖에 생각이 안나는거 있지요. 」

재인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턱근육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게 고등학교 때 일이에요.  웃어도 되요. 어떨 땐 나도 우스워요.」

웃음을 참고 있는 재인을 보며 다현은 미소지었다.

「난 우리반 애들이 나같은 경험을 하길 원치 않아요. 그래서 우리반은 점심시간에 클래식을 틀어놔요. 걔들은 나 때문에 의무적으로 일주일 내내 같은 곡을 들어야 해요

. 내 수준에 맞춘 거니까 할 수 없지요.」

「뭐. 당신같은 선생, 아니 선생님 밑에 있는 애들은 행운이오, 적어도 숭어가 어떤 곡인 줄은 알 거 아니오.」

그가 겨우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애들은 이틀만 들으면 그 음악이 뭔지 알아요, 하지만 아직도 난 아니에요. 난 진짜 아무래도 그 분야에는 학습장애가 있어요.. 」

재인이 다시 쿡쿡거리자 그녀가 코에 주름을 잡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어쩌겠어요. 아무래도 내취향이 아닌걸.」

「내 취향도 아니오.」

재인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아닌거 같은데요. 날 위로하려고 들지 마요. 아까 그렇게 듣고 또 클래식 듣는 사람이 클래식 취향이 아니라구요.」

「그냥 즐겨 들을 뿐이오. 가사없으니까 신경 안써도 되고 요새 음악같이 시끄럽지 않아서 생각하기 좋구 음악이라구 나오니까 심심치 않고.

그런 이유 때문에 듣는 거야. 특별히 조예가 있는게 아니라.」

「그게 나랑 틀려요, 난 그걸 들으면 훨씬 심심하고 갑갑해요. 」

재인은 클래식 애호가다. 그가 사 모은 CD만해도 1000여장이 넘을 거고 웬만한 클래식은 전문가보다 훨씬 조예가 깊다.

재인이 아까 말한 얘기는 진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이 신분의 상승이라고 생각하는 재인근처를 맴도는 어떤 여자들은

정말 재인의 취향이 아니다.

재인은 다현에게 그 얘길 하려고 했지만 다현은 음악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의 집에 거의 다가오자 그녀는 짐을 챙기며 재인에게 잊고 있던 인사말을 전했다.

「잊을 뻔했는데 고마워요. 경은이 문제 해결해줘서.」

「어, 어떻게 알았지? 방학이나 끝나야 알 줄 알았는데」

「내가 오늘 재인씨를 왜 만났게요. 벌써 확인했지요, 진심으로 고마워요. 그만큼 신경써준거.」

그녀는 정말로 감사했다. 재인은 그녀가 생각한 이상으로 경인에게 해주었다.

재인이 살짝 고래를 가로 저었다.

「그 아이 진짜 천재더군, 당신이 제대로 봤어. 그리고 그건 우리거래였으니까. 그렇게 고마워 할 필요가 없어. 말그대로 정당한 댓가니까.」

「그래도 고마워요. 다음주에 만나요. 조심해서 올라가시구요. 」

재인이 나서서 채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다현이 문을 열고 나가며 깍듯이 인사했다.

'도대체 내가 남자로서의 기본매너를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을 안주는군 '

재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창문을 내려 그녀에게 인사했다.

「잘 자요. ...다다.」

19

「빨리 불어. 그래서 그남자 어땟는데?. 」

「뭐,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어 」다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대한민국 재벌쯤 되는 남자와 데이트하고 나서 소감이 겨우 그거야」

다현의 중학교 친구인 현진은 그녀가 전부 털어놓지 않고 얘길 얼버무리자 인상을 썻다.

어쨌을까 라는 생각아주 어려웠던 학창시절 현진이 없었으면 이 들 정도로 소중한 친구였다. 현진은 아주 여성적이고 가냘픈 외모와 달리 털털하고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현진의 외모에 속아서 공주 모시듯이 현진을 떠받들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현진은 충분히 여우였다.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무기로 써먹을 줄 알는 여자였다.

「그래서 언제 보여줄꺼야 ?.」

「좀 기다려. 나도 다음에 언제 볼지 잘 몰라.」

「테스트를 해봐야 할 거 아니야 ?.」

대학 다닐 때 종종 현진은 테스트란 미명아래 다현의 미팅상대를 찔러봤었다. 혹여라도 현진의 미모에 조금의 관심의 빛이 보였다 하면 그날로 그 만남은 끝이었다.

현진의 말에 의하면 그런 자식들은 오래 키워봤자 조강지처 버릴 놈이란다.

하지만 다현은 저렇게 예쁘게 생긴 현진이 와서 생긋생긋 웃으며 비위맞추는데 혹 하지 않을 남자가 없다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때도 지금도 남자엔 별 관심이 없어서 현진의 그런 장난을 웃으며 넘겼었다.  재인도 그 남자애들 같을까? 어쩐지 현진에게 재인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현의 얼굴에 지나가는 호기심과 망설임 그리고 맘속 깊이에 감춰진 그 남자에 대한 호감까지를 전부 읽어내며 현진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 그녀의 특별한 친구가 임자를 만난 모양이다.

「형, 음악회 좋았었다며. 」

재선은 호텔 회의실 창가 의자에 앉아있는 재인의 표정을 살폈다.

「생각보다 프로그램이 잘 짜여져 있더라.」

재인은 재선이 궁금해 하는 부분을 모른 척 지나갔다.

「엄마가 궁금해 하셔.」

크레물린이 따로 없다니까. 형의 딴 대답에 재선이 재인을 물고 늘어졌다. 재인과 그 젊은 여선생과의 소문은 이미 세인의 관심거리였다.

아마 형도 귀가 있으니까 그 정도는 들었을텐데 딴청을 피우고 있다.  재인이 여자를 동반하고 음악회에 참석한 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재인의 활짝 웃는 모습과 전혀 얼굴이 안 알려진 여성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더욱이 화랑 오픈식에 그녀를 다시 대동한 재인의 속셈은 더욱더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래... 작은.. 엄마는 몸은 괜찮으시구. 」

「응. 형이 결혼할지 모른다고 흥분해 계셔.」

「아서라. 행여래도 그럴지 모른다고 바람 넣지 마.」

그가 질색을 하고 경고했다.

「바람은 내가 아니라 형한테 불고 있는거 같은데.」

빙글거리는 재선의 어투에 재인의 눈썹이 약간 올라갔다.

「이거 왜이래. 음악회때도 형이 좋아서 입을 못 다물고 그 여자만 바라봤다는데.」

「할아버지 귀에만 정확히 들어가면 돼.」
「그럼 할아버지 때문에 그렇게 실없이 웃었다는 거야.」

재선이 못믿겠다는 듯 대꾸했다.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싶은거야. 사람들이 전부 장님인 줄 알아. 정회장님네 화랑오픈에는 나도 갔었어.」

「그래서?」

재인은 여전히 고압적인 자세로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는 무슨. 그 여선생은 몰라도 형은 그녀에게서 눈도 떼지 못하던걸. 」

재선이 말끄러미 형을 쳐다보며 지적했다.

「그렇게들 보였다면 전부 장님이구나.」

「인정하시라구. 처음엔 장난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지? 」

그의 동생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질렀다.

「임마. 이제 세 번 만났어. 뭐 좀 남다르기는 하지만 눈도 떼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

「사랑은 첫눈에 필이 팍 올 수도 있다구.  아 이 여자 다 하고」

「처음 볼 땐 너도 있었어. 우린 서루 원수였다구. 」

우리라고.. 형이 자기가 한 말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누가 알아. 그게 첫눈에 반해서 그런 건지. 역반응으로 나타날 수도 있잖아.」

「너 그거 경험에서 나온 얘기냐 ?. 」

「아니지. 당연히.」

「다행이구나. 그거」

그는 동생의 추궁에 눈도 깜짝 하지 않았다.

「형. 그럼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야. 지금. 」

재선은 집요했다. 그래도 그는 명색이 잘나가는 로펌의 변호사 아닌가.

「잘 몰라. 아무튼 다른 여자랑은 확실히 달라. 」

진심이다. 그는 다다를 잘 모르지만 그녀가 여태 만났던 다른 여자들과 확실히 다르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가끔 불쑥불쑥 떠오르는 다다의 생각에 웃음지을 때가 있었다. 그녀는 흥미롭고 남다르다. 그리고 볼 때마다 즐거워진다.

재선은 형의 얼굴에 스친 미소에 웃음지었다.

20

「호텔 SH 에머럴드 기조실입니다.」

「저, 이재인씨 계신가요?. 」

「실장님이요 ?. 지금 회의실에 계신데 급한 일이십니까. 메모 전해드릴까요 ?.」

「네. 죄송합니다. 말씀 좀 전해주시겠어요 ?.」

「아, 잠깐만요.」

유경은 책상위의 메모지를 확인했다. 「말씀하세요.」

「김다현이라고 합니다. 오늘 저녁 약속에 못나갈 것 같다구 전해주세요. 집에 급한일이 생겨서. 죄송하다구요. 」

젊은 여자의 조용한 그렇지만 또랑또랑한 맑은 목소리였다.

「그렇게만 전하면 될까요. 」

「네. 부탁드립니다. 」

전화기속의 그녀는 예의바르고 정중했다.

우리실장이 만나는 여자 중에 이런 사람도 있었군. 틀림없이 개인적으로 만나는 여자는 아닐 거야, 유유상종이라고 실장이 만나는 여자들은 실장하고 똑같았다

. 성질급하고 건방지고. 또 그녀들에게 맞추어 세상이 돌아가야 하는.

그녀들은 집안의 굉장한 후원과 자난 환경 탓인지 아무리 숨길려고 해도 그 건방진 언행이나 도도한 성품의 한구석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물론 무례하다는 건 아니지만 유경이 듣기에 어쩐지 기분 나쁜 구석이 있었다. 그게 환경탓이라고 하나 아니면 보통집안에서 자란 나의 자격지심인가....

아닐꺼다. 좋은 집에서 자란 사람들이 다 그럴려고. 실장이 만나는 인간들이 그 모양이지.

특히 그 허스키한 목소리의 차가운 한주희는 정말 밥맛이다. 나이는 얼마 안먹은 것이 은근히 반말이다. 가끔 생각할 때가 있다. 우리실장 같은 인간이랑

그 냉정한 여자가 결혼하면 아주 볼만 할 거라고. 뭐 둘이 인물은 좀 반반한편이니까 겉으로 보기엔 어울리겠지만 아마 사는게 전쟁이리라.

괜찮은 사람은 대성그룹의 박윤서씨뿐이다. 유경은 윤서에게 한편으로 측은한 심정이 드는 걸 참을 수가 없다.

그런 괜찮은 아가씨가 왜 우리실장이랑 친하게 지내는지 ... 원 덕볼 게 하나도 없을텐데.

유경은 적은 메모를 책상 위에 남기려는데 재인이 들어섰다.

「저 실장님 찾는 전화 왔었는데. 」

「오전에 온건 메모리 해두었구요. 방금... 」

그녀는 메모용지로 눈을 돌렸다.

「김다현씨라고」

「어. 다현이가 전화했었어.」

실장이 대뜸 묻자 유경은 잠시 당황했다.

「아, 예, 방금전에 왔었는데 오늘 아무래도 약속 지키기가 곤란하다고... 」

유경은 실장의 얼굴표정이 굳어가는데 불길한 예감이 들어 얼른 고개를 숙였다.

눈이라도 마주쳤다가는 저 도깨비한테 무슨 벼락을 맞을지 몰라.

「그 얘기밖에 없었어?.」

재인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예, 죄송하다구요.」

「이런 제기랄.」

실장은 낮게 중얼거리고는 책상을 돌아 자리에 앉아 전화기를 들었다.

「언제 온 전화요?. 」

「실장님 들어오시기 바로 전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김다현씨 부탁합니다.」

실장이 그녀에게 손짓으로 가보라는 표시를 하자 유경은 한숨을 돌렸다.

「아. 알겠습니다. 몇 시쯤 나가셨나요... 예...고맙습니다. 」

재인이 전화기를 내팽겨치는 소리에 열려있던 문 사이로 유경은 진저리를 쳤다.

저러다 전화기 바꿔야 할거야. 유경은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감히 고개를 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기랄.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일방적으로 전화 통보 하나 하고는 쪼르르 나가 버리다니.

그는 머리에 열이 올랐다. 도무지 그녀와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무슨 여자가 그 흔한 핸드폰도 없어서... 처음만난 날 다현이 사용한 그의 전화기에 입력되어 있는 번호를 그는 전화기에 저장해 두었다.

집으로 전화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게까지 하기엔 약이 올랐다. 젠장 이럴줄 알았으면 그런 약속따위 하지 않는 건데.

서로의 연락장소를 가르쳐줄 때 다현은 집으로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것도 거래중의 하나요?」

그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다현이 환하게 웃으며 사정했다.

「아니요. 이건 개인적인 부탁이에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요?. 」

그때 생각으로는 그녀 집에까지 연락할 중요한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사실 연락 그 자체에도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는 그때 그 약속을 후회했다. 설마 오늘같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그가 그녀와의 만남을 즐기고 있다는 것은 짐작도 못했다. 그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독특했다.

재인이 알고 있는 세계에서는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 무척 주요시되는데 다현에게는 아니었다. 그녀는 슬플 때 울지 못하는 사람은 감정이 메마른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고 기쁠 때 입가에 미소조차 없는 사람은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라 꽉 막히고 답답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그녀는 아마도 재인을 그런 분류로 보는 듯 했고 몇 번을 강조해서 그건 좋지 못하다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마치 그녀의 반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듯이.

그런 그녀가 오늘 날 바람 맞혔다. 제기랄.

21

「오빠. 이젠 집에서 다니는 거야.」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큰아들 덕에 상다리가 휘어졌다.

「형. 머리 짧은 것도 괜찮은데.」

준현이 언제나의 우상 서현을 부러운 듯 쳐다봤다.

「니들도 이제는 연애 좀 하냐. 」

서현이 다현과 현진을 보고 물었다.

「오빠랑 준현이가 그렇게 여러 여자 울리는데 내가 뭘 보고 배워서 연애를 해. 」

현진은 코웃음을 쳤다. 중학교때부터 십 년을 넘게 지낸 사이라 현진은 이 집안의 맏딸이나 마찬가지였다.

워낙 뛰어난 미모를 하고 있는 서현과 현진은 친남매로 오인받기 일 수였다. 사람들은 오히려 다현이 남의 식구인줄 안다.

「나야 여자들이 가만 안두는거지. 근데. 준현이 너도 그러고 다니니?.」

「형만한 아우 없잖아. 그래도 형 정도는 아냐.」

「그래도 이제 다다도 선도 보고 그래. 아마 올해는 어떻게 될 것 같다. 」

엄마는 다현의 경과보고를 큰아들에게 하며 웃음지었다.

「너 많이 발전했다. 옛날엔 시잡 안간댔잖아.」

의외라는 듯 서현의 눈썹이 올라갔다.

「옛날이라 봤자 작년이야. 맘은 바뀔 수도 있는 거지 뭐. 」

약간 찔린 표정으로 다다가 중얼거리자 준현이 코웃음을 쳤다.

「형 누나는 약아졌어. 」

「준현이 니가 몰라서 그렇지. 원래 얜 약았었어. 」

현진이 끼어들었다.

「넌 친구도 아니야. 이 웬수. 」

서현은 다현이 준현과 현진을 번갈아 노려보자 무슨 일인가 싶어

동생들의 얼굴을 지켜봤다.

「무슨 일이야. 너희들. 」

「나중에 얘기할게. 형.」

다다의 인상이 험악해지자 준현이 말을 마무리했다.

「언제부터 병원 가는거야. 오빠.」현진은 분위기를 바꿔 서현에게 물었다.

「이제까지도 병원에 있었어.」

서현은 이제 군의관 생활을 마무리하고 군대가기 전 대학병원으로 복직할 예정이다.

아마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더 바빠지겠지만 그래도 양구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가깝게 볼 수 있을테다. 서현은 어린시절 다현과 준현, 그리고 현진의 우상이었다.

키크고 공부 잘하고 다른 친구들 오빠보다 훨씬 더 멋있는 오빠였고 현진에게는 한 번도 가질 수 없었던 형제였다.

서현 오빠가 주말을 틈타 가족을 만나러 왔다는데 재인을 만날 수는 없다. 웬지 이재인이 엄청 화를 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쩌면 한주일 그냥 넘어가서 좋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가 전화를 안받아서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다현은 흘끔 전화기를 바라봤다.

실장이 전화기를 내던지듯하고 나가버리자 기조실 직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봤다.

실장은 질릴 정도로 공사가 분명한 사람이다. 봉급받고 일하는 사람이니까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는 일할 때는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는 사람이었다.

보통 그가 사무실에서 열받아 씩씩대는 것은 호텔 일 때문이지 그 외의 문제로 화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는 세인의 관심거리인 그의 대단한 집안이나 결혼적령기에 떠도는 여자문제에 대해선 사무실에 입도 벙긋하지 않는다

. 거의 속내를 알 수 없는 그가 웬 여자 전화 하날 받고 불붙은 용같은 모습을 하고는 나가버린 것이다.

「도대체 그 여자 누구야? 유경씨.」

심상치 않은 재인의 모습이 사라지자 기조실 직원들이 물었다.

「몰라요. 나도 처음 듣는 목소린데」

「뭐야 .우리실장한테 그럼 여자 생긴 거야.」

기조실 직원들이 멀뚱멀뚱 얼굴을 마주했다.

「아서요. 그런 소리 말아요. 어떤 여자인지 우리실장 피해가는 게 팔자 피는 거라구요. 」

유경이 질색을 했다.

「아니야 그래도 어쩐지 이번은 좀 느낌이 다른데. 뭔가 있는 것같아.」

「혹시 저번 음악회때 그 여잔가. 왜 소문 짜했잖아」

「실장 옆에 여자 없는 것 봤어. 일들 하라구.」

「그래도 이번은 아무래도 좀 다른데...」

기조실 식구들은 다시 얼굴을 마주했다. 어쩌면 실장이 진지한지도 모르겠다.  잘만 되면 실장은 결혼을 할테고, 더 일이 잘되면 저 더러운 성질은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아마도.

화가 잔뜩 난 재인의 연락을 받고 다현은 학교앞으로 나섰다.

「어. 웬일이세요...여기까지」

교문 앞 좁을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서있는 재인을 찾아내고 다현은 의외라는 시선으로 다가섰다.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그녀와 재인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흘끗거리고 지나가고 있었고 그중 몇몇은 일부러 다현과 재인에게 다가와 꾸뻑 인사까지 했다.

좀 조숙한 녀석들은 재인의 차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며 그 옆을 서성거렸다. 다현은 약간 인상을 그었다.

내일이면 엄청난 소문이 생기겠군, 열네다섯살짜리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은 소설이나 영화에 견줄 바가 아니다.

「끝났으면 어서 타.」

그가 다현을 째려보고 있었다.

이남자는 또 왜 이렇게 토라져 있을까.

「한 삼십 분은 더 있어야 돼요.」

그녀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오늘은 정말 힘들군. 어제 개학이 되어 오래간만에 학교에 온 애들은 약간의 흥분과 기대로 통제가 어려웠고

내일은 애들 입에서 나오는 엄청난 질문을 받아야 한다. 더욱이 눈앞의 이 남자는 잔뜩 심술이 나서 만만하지는 않을 것 같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저 밑에서 기다릴 순 없어요?.」

그녀가 작게 부탁했다.

「여기 있을 거요. 」

그가 다시 그녀를 째려봤다.

'맘대로 하시라구요.'

그녀는 어깨를 약간 으쓱하고는 돌아섰다.

그녀의 학교 골목길은 작아서 그의 큰 차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다른 차들이 움직이는데 고생을 해야 한다.

그대로 저 자리에 서 있으면 아마 몇 번이고 차를 빼주는 수고를 해야 할텐데. 나오는 애들 때문에 운동장으로 차를 갖고 들어 올 수도 없는 노릇일테고 .

'알아서 하시라구요, 아저씨.'

재인이 불쑥 내민 핸드폰에 다현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왜 날 줘요?.」

「갖고 다녀.」

「난 이런 거 필요없어요.」

다현은 만져보지도 않고 그냥 흘끗 눈을 바라보고는 거절이다.

이 여자는 진짜 별종이다. 갖고 싶지는 않더라도 보통 흥미는 있을텐데 한번 쳐다보고는 그만이다.

「다다한테는 몰라도 나한테 필요해.」

그가 이를 갈 듯 그녀 손에 핸드폰을 쥐어 주었다.

「재인씨 핸드폰 없어요? 당신걸 왜 날 줘요.」

그녀는 그제야 핸드폰을 들여다 봤다.

「다다꺼야. 도대체 연락을 할 수가 있어야지. 학교에 걸면 맨날 수업중이고. 도대체 자리에 붙어있질 않는다구. 수업은 혼자 다하나?.」

재인이 다시 그녀를 째려봤다.

「난 학교 선생님이라구요. 당연히 수업이 내 일이지요.」

「아마 당신네 반 애들도 핸드폰 갖고 있을 거요. 그 흔한 핸드폰도 하나 없구. 집으로는 전화도 못걸게 하고.」

재인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 심술을 부렸다.

「그다지 내게 연락할 일이 많은게 아니잖아요. 난 이런거 줘받자 금새 잊어먹을 거라구요. 」

그녀가 그를 달래느라 웃어 보였다.

「도대체 왜 집에는 전화를 못하게 하는 거야?.」

그가 소릴 질렀다.

재인은 그 사실이 더더욱 화가 낫다. 왜 이 여자는 나란 존재를 알리지 않으려고 할까 ?

「재인씨 우리집에 전화해 봤자 우리엄마 오해만 사요. 할 필요가 없다구요. 그리고 헤어질 때 약속하고 급한 일도 별로 없는데 그게 뭐가 중요해요.」

그녀는 재인을 달랬지만 그는 계속 부루퉁한 표정이다.

이 여자는 평소에는 전혀 내 생각을 하지 않는 모양이군. 재인은 속으로 끙끙거렸다.

그는 다다를 만난 이후로 수시로 떠오르는 그녀 생각에 머리를 저을 지경이다. 재인은 다다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에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전화기를 들었다 놓는데 이 여자는 전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아무튼 갖고 다녀. 다다는 어떨지 몰라도 난 연락할 일이 많으니까. 그리고 우리거래는 공평하기로 했잖소.

다다는 내게 연락할 수 있는데 난 할 수 없다는 건 불공평한 거요.」

그는 인상을 박박 그어가며 그녀 손에 핸드폰을 쥐어 주었다.

「틀림없이 한 달밖에 안갈 거에요. 난 잘 흘리고 다닌단 말에요.」

그녀는 할 수 없다는 받아들이고 중얼거렸다.

「그럼 좀 더 신경을 쓰라구.」

그녀가 마지못해 받아들이자 재인은 좀 마음이 풀렸다.

「이거 쓰는 방법도 몰라요. 이딴거 첨인데」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울리면 받으면 되고 1번 계속 누르고 있으면 내 핸드폰으로 연락되고 2번은 우리 사무실이야.」

재인은 집전화도 단축키로 저장되어 있다고 얘기할까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나중에 핸드폰 열어보면 알게 될 일이다.

「당신한테밖에 연락올 데도 없을텐데. 이건 낭비라구요.」

그녀가 계속 구시렁대자 재인이 씩 웃었다.

「그게 바라던 바요. 」

「뭐가요? 낭비가요 ?.」

「아니. 나밖에 연락할 사람이 없다는게. 아무 놈팽이한테나 번호 가르쳐주지 말라구.」

22

「그래서 태하쪽 움직임은 어떤데?」

재인은 오랜 친구 윤후와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은 한쪽 출입구를 제외하고는 유리벽으로 밀폐되어 있었고

그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글쎄. 그 녀석이 무슨 짓인가 벌이고 있는 것 같은데... 백화점 주식동향 보면 틀림없이 원가 있다구. 네쪽에는 뭔가 잡히는거 없구? 」

사채시장의 황금손으로 불리우고 있는 윤후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아직은... 주식갖고 장난칠려면 돈이 필요할텐데. 이쪽은 잠잠해. 」

「정기이사회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인데... 」재인은 곰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모부의 움직임도 태하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재인은 이사회에 영향을 끼칠만큼 SH화점 소유지분을 외할머니에게서 상속받았다.

당연히 그의 ..작은...어머니 소유여야 했지만.

재인이 갖고 있는 주식으로는 이사회 장악은 어렵겠지만 그가 작정하고 덤빈다면 백화점소유자는 바뀔 수도 있다.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것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은 말이다. 맘에 들지는 않지만 태하 그 녀석은 그래도 백화점을 제대로 운영하고 있다.

다만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영향에서 독립해야 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 그의 경영능력을 재인은 인정하고 있다.

혹시라도 그가 어설펐다면 재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백화점을 접수했을 터였다.

「혹시 회장님 상속얘기 샌건 아니구 ?.」

「절대 그건 아니야. 태하 그 녀석이 그 정도는 못된다구. 아직 할아버지 영역에 머리 들이밀 녀석은 아니야. 고모부라면 모르겠지만.」

박윤후는 오래간만에 보는 밝은 표정의 친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너 그 얘기가 진지하게 진행되는 거야?  」

윤후가 뜬금없이 물었다.

「뭐가?」

「연애한다는 얘기.」

윤후가 간단히 얘기 했다.

윤후는 재인의 아주 오랜 친구였고 서로가 믿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기였다.

「진지하면 안되는거냐?」

친구의 의혹에 찬 눈길에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재인이 대꾸했다.

「너 설마... 」

윤후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누구보다 이 회장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야. 그런거...」

재인이 친구의 걱정을 눈치채고 살짝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 의도를 전혀 개입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네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

「그럼 진심이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얼음덩어리 같은 친구가 이회장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수하고도 연애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다는 것은 의외였다.

「아마도.」

재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 그럼 형님한테 먼저 보고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제수씨 얼굴이래도 봐야지.」

윤후가 활짝 웃었다.

「임마. 제수씨가 뭐냐. 형수님이지. 안그래도 오늘 이리 나올꺼야. 」

재인이 손목시계를 흘끗 보고 얘기했다

「어?, 이자식 진짠가 보네.」

윤후는 자신한테 소개해줄 그녀가 궁금해졌다.

잘 속을 보이지 않는 이 친구가 그의 그녀를 보여줄 작정이란다.

「궁금한데. 어떤 여잔지」

「독특해.」

재인은 다현을 한마디로 정의했다.

「저기 오네. 」

재인은 아주 많은 사람 중에서도, 지나가는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녀를 골라낼 수 있었다. 오직 그녀만이 그의 눈에 띄니까.

다현은 재인이 모르는 어떤 사람과 같이 앉아 있자 약간 당황해했다.

재인과 윤후는 다현이 앉을 때까지 약간 서서 기다렸다. 다현은 눈앞의 두 남자를 번갈아 보고는 재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인이 소개한 윤후는 따뜻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항상 짓고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웃음이 그를 훨씬 부드럽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다현씨 점심시간인데 식사하지요 우리. 제수씨를 위해 제가 근사한 걸로 살께요.」

「또 제수씨라네. 너 밥 산다는 얘기 후회할거다.」

「왜? 」

「우리 다현이는 엄청 먹거든」

재인이 키득거렸다.

「재인씨!」

다현이 기겁을 해서 재인을 노려봤다.

아니 이 남자가, 그리고 우리 다현이라니. 저런 식의 친밀한 표현을 윤후가 어떻게 이해할지 걱정스럽다.

「어. 그래요? 그럼 더 좋지요. 난 잘 먹는 여자가 더 좋거든요.」

「꿈도 꾸지 마라. 」

재인이 달라진 목소리로 경고하고 나서자 윤후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 드시겠습니까?.」

윤후의 손짓에 두고 간 메뉴판은 다현을 머리 아프게 했다. 가끔씩 선을 보면서 먹어주는 음식이나 재인과 평소에 먹던 음식과는 차원이 다른 용어들이었다.

이 길 찾기 어려운 프랑스 식당은 음식고르기도 까다롭구만.

다현은 이 프랑스 음식 전문점이라고 쓰여진 뭐라고 읽지도 못하는 간판을 찾느라 이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이거 읽지도 못하겠어요. 너무 끔직스럽지 않은 음식으로 내것까지 시켜줘요.」

다다가 눈이 둥그래져서 재인에게 부탁하자 다다의 상황을 짐작하고 재인이 키득거렸다.

「다현씨 재인이가 혹시래도 속 썩이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다 해결해 드릴테니까.」

재인이 윤후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다 말해. 해결해 주는게 저녀석 본업이니까.」

「아직까지는 저혼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어요. 하지만 힘들어지면 말씀드리지요.」

다현이 싱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재인이 저자식이 성질 죽이고 사는 모양이군요. 원래 그런 놈은 아닌데.」

「어쩌겠어요. 그럼 그정도는 감수해야지요.」

다현은 여전히 싱글거렸다.

「다현씨라면 저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임마. 나도 아직 여기 있어. 아주 둘이 죽이 잘 맞는구만.」

재인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괜시리 다현을 소개한 모양이었다. 윤후 저자식 눈빛이 반짝이는게 영 맘에 들지 않는다. 다다가 저렇게 환하게 생글거리는 것도.

「이해하세요. 쟤가 좀 성질이 좀 고약하거든요.」

윤후는 재인의 날카로운 경고를 무시하고 다현에게 집중했다.

「이미 알고 있어요.  하지만..뭐 저도 남 얘기할 입장이 아니거든요.」

다현의 진지한 말에 재인과 윤후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현씨, 혹시 여동생 없어요?.」 윤후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23

「안녕하세요? 호텔 에머럴드 SH 기조실입니다.」

유경은 이재인 실장의 핸드폰을 받아들고 대답했다.

남들은 회의들어갈 때 핸드폰을 끄고 들어가는데 이 웬수는 핸드폰을 던져두고 나가서 사람으로 하여금 받을까 말까를 고민하게 한다.

「어? 」

약간 당황한 듯한 목소리 뒤에 조심스러운 어조가 흘러 나왔다.

「죄송합니다. 이재인씨와 통화하고 싶은데... 어려울까요?... 」

꼭 이 곳의 사정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예의바르고 똑똑 떨어지는 어조... 이목소리는 귀에 익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언젠가 들은 목소리다.

「저, 지금 회의중이신데.」

유경은 아까부터 제주의 총지배인이랑 머리를 맞대고 있는 재인을 흘끗 바라봤다.

유경은 도박을 하기로 했다.

「음... 저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

운이 좋으면 이 전화의 주인공은 그녀다. 언젠가 그녀와의 통화가 두절됬을 때 머리 꼭대기에 김을 팍팍 내던 이재인 실장의 그녀.

그렇다면 바꿔주는게 현명한 일일수도 있다.

'운이 좋다면 말이지, 아니라면...'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런 생각은 하기도 싫은 일이다.

「실장님」

유경은 열심히 제주호텔의 총지배인을 향해 뭔가를 설명하고 있는 실장을 불렀으나 그는 들은 척도 안한다.

집중하느라 못듣는 건지 아니면 듣고도 안들은 척 하는 건지. 회의실에서 모여 앉지 않을 걸 보면 정식회의는 틀림없이 아닌데.

점심조차 걸러가면서 뭘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건지.

「실장님 전환데요. 」

아까보다 조금 큰 소리로 부르자 사무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유경을 주시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실장의 눈초리는 사나웠지만 어디 이게 하루이틀 겪은 일인가.

전화기 속의 그녀가 실장을 잘 해결해주길 유경은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녀가 핸드폰을 들어올리자 실장이 노려보며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그저 씩씩대기만 하고 그녀 손에서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이재인입니다. ... 어? 」

유경은 순간 숨을 꼴깍 삼켰다. '아이고 아니면 어떡할거나?'

재인의 목소리 톤이 약간 낮아졌다. 그리고는 약간 전화기를 귀에서 떼고는 계속 진행하라고 손짓을 했다.

「오늘? 웬일이지?」

즐거운 듯한 목소리

유경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올바른 선택을 한 모양이다.

유경이 고개를 들자 기조실직원들의 환하게 펴진 얼굴들이 들어왔다. 우습게도 총지배인의 얼굴에도 웃음이 얼핏 스며 있었다.

이 깐깐하고 당당한 총지배인도 성질 드러운 실장으로부터 벗어나는게 행복한 모양이다. 아무튼 실장의 목소리는 이제 사람소리처럼 들리고 있었다.

「그럼 어디가 좋을까?...  여기로? ... 그럼 나야 좋지... OK 7시...아참 라운지에서 얼쩡대지 마. 멍청해 보이니까...」

여자한테 쓰는 말투하고는.... 누군지 고생길이 훤하네...

유경은 실장의 그녀를 위해 생기는 동정심을 막을 수 없었다.

「알았어. 그때 보자구.」

핸드폰을 접은 실장의 표정은 변함없었지만 유경과 기조실 직원들은 무언가 실장에게 다른 변화가 있을 거란 기대감을 버릴 수 없었다.

「누구야?  유경씨? 」

「그때 그 사람이요. 」

유경이 간단하게 얘기했지만 워낙 실장 일에 민감한 식구들은 누군지 감을 잡았다.

「이거 뭐야? 진짜 여자 생긴거네, 우리실장. 」

기가 막힌 어조로 최인규과장이 입을 열었다. 젊고 패기있는 엘리트 과장이었지만 동갑내기 실장의 추진력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고

실장이 여자를 사귈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어떤 사람이길래 우리실장을 극복한거야 」

아무래도 직원들은 그게 궁금했다.

「실장이 푹 빠진 것 같은데.」

그들은 사실 그 점이 더 이상했다. 워낙에 실장의 배경과 겉으로 보이는 조건이 반반해 보여 이 여자 저 여자 엄청 꼬이기는 했지만

실장쪽에서 열올리고 여자한테 접근하는 모습은 그들로서는 정말 생소한 일이다.

「누굴까? 도대체...」

「그렇게 궁금하면 이따 살롱으로 나가보세요. 거기서 만나는 거 같은데 」

SH직원들은 커피숖은 살롱이란 이름으로 부른다. 객실과는 또다른 세계를 연출해야 하는 곳이고 그곳의 분위기는 16세기 프랑스 귀족부인의 호화로운

개인 거실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아마 인테리어 자체도 그 시대를 연상하고 기획했을게 틀림없다.

그 시대가 로코코인지 바로코인지는 관계없이 호텔의 그 코피숖은 그런 호화롭고 낭만적인 분위기 때문에 호평받는 곳 중의 하나였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주말에는 괜찮은 집 자제들의 맞선장소로 많이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주 현대적인 최고급시설의 객실과는 다른 좀 시대적이고 귀족적인 그곳을 커피숖으로 부르기에는 뭔가 미흡하다 싶어서인지

SH살롱이란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무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거기까지 나갈 용기는 없어. 그러다 실장이랑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걸 어쩌라구.」

재인은 직원들이 뭐라고 얘기하는지 전혀 모르지만 썩 기분이 좋았다.

다현이 그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니 다현으로부터 받은 전화조차도 처음이다.

그녀와 만나는 석 달 동안 한 번도 먼저 연락을 취한 적이 없다. 겨우 전화라고 한번 걸어온게 - 그것도 직접 통화조차 하지 못했다.-

그를 바람맞혔을 때 뿐이다. 그게 재인에 대한 관심부족인지 아니면 그녀의 고집스러운 성격 탓인지는 몰라도 재인은 그게 영 마땅치 않았었다.

핸드폰을 손에 쥐어줘도 그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는 다다에게 그는 심통이 나는 게 사실이었다.

그는 일곱시가 되기전에 부리나케 살롱으로 향했다. 저녁시간대라 살롱은 붐볐고 재인은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는

여직원 - 직원들 사이에서는 마담이라고 불리우는 - 에게 약간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다다는 평일이라서인지 사무적인 옷차림이었다.

짧은 회색 재킷에 같은 색 스커트 차림이었다. 다다는 재인을 발견하고는 씩씩하게 걸어와 재인 앞에 앉았다.

24

다다는 재인을 발견하고는 씩씩하게 걸어와 재인 앞에 앉았다.

「일곱시 아직 안됬을텐데... 」

그녀가 시계를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시계 차는 걸 무지 싫어했다.

「 응. 아직 안됐어. 내가 좀 일찍 나왔어. 」

「그렇죠? 」

그녀가 안심했다는 듯 방긋거렸다. 재인은 오렌지 쥬스를 그녀 몫까지 시킨 뒤 편안한 자세로 다현을 응시했다.

주문을 받는 여직원이 다현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는게 느껴졌다.

「배 안고파? 」

재인이 허락도 없이 계속해서 반말을 했을 때 다현은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재인은 까딱도 안했다.

「다다가 걸음마할 때 난 학교 다니고 있었다구. 뭘로 보나 내가 까마득한 선배야.」

다다의 약오른 표정에 재인이 느긋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그렇게 약오르면 다다도 말 놓으라구.」

「재인씨한테 반말할 만큼 난 안친해요. 」

그녀가 얄밉다는 듯 흘겨보자 재인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제는 재인의 자연스러운 반말이 당연하게 들린다. 그만큼 서로에게 시간이 흐른 모양이다.

「배 안고프냐니까?」

재인이 재차 물었다.

「글쎄요...」

재인의 질문에 다다가 눈만 깜빡거렸다.

「다다는 나만 보면 '배고파요'가 인사아냐, 밥 먹으로 가자.」

「무슨, 몇 번이나 그랬다고.」

다현이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왜 항상 약속시간을 밥시간에 맞춰요? 그렇지만 오늘은 배 안고파요」

「오늘은 내가 배고프다구. 점심에 칼국수 한 그릇 먹고 아무것도 못먹었어」

저 등치에 칼국수 한 그릇 먹고 버틸려면 힘들기도 하겠다, 성질도 고약한 사람이 배고프면 더 할텐데.
.

다다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난 오늘 내가 안고프다구.

「난 애들하고 떡볶이 먹었는데. 아무튼 우린 궁합도 무지 안맞아요」

「먹는 건 궁합 좀 틀려도 상관없어. 다른 거만 잘맞으면」

재인은 응큼한 표정을 지었다.

「먹는게 반이에요. 그게 얼마나 중요한데요 짠거 싱거운거 매끼니 전부 중요하다구요.」

말 속에 섞인 재인의 야릇한 의미를 못알아 들은 척 그녀가 음식을 강조하고 나섰다.

「먹는건 소인이 얼마든지 맞출테니 걱정 말고 일어나시지요. 아가씨.」

「오늘 내가 왜 보자고 했는지 안 궁금해요?」

「글쎄. 갑자기 내가 엄청 보고 싶었대도 이해해」

재인이 느긋해진 표정으로 장난을 걸었다. 창밖풍경이 아름다운 식당이었다.

「고맙네요. 갑자기 그렇게 이해심이 넉넉해지셔서」

그녀가 코웃음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참아야죠. 내가.」

새침한 표정으로 짓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생긋 웃어 보이자 재인은 가슴 한쪽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에 그는 약간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저 여선생은 그냥 여자일뿐이야.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다고.

「해피버스데이. 재인씨」

그녀가 내민 건 작은 선물상자였다.

재인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자 그녀가 그의 손에 상자를 쥐어 주었다.

「내일모레 재인씨 생일이지요?」

「어? 그런가, 몰라」

「난 알아요.」

그녀가 테이블위에 두 팔을 올려놓고 약간 고개를 드밀었다,

「내일은 우리학교 학부모회의 있어서 내가 바쁘구요, 생일날은 식구들끼리 밥먹을테니까.. 그래서 오늘 미리 주는 거에요.」

다현은 열심히 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일은 지나서 주는 거 아니라면서요.」

재인이 아직도 당황해서인지 상자만 만지작거렸다.

「안풀어봐요?.」

「어? 응.」

재인은 난데없는 다현의 생일선물에 당황해서 잠시 제 페이스를 잃고 말았다.  얼음덩어리 이재인이 왜 이 젊은 여교사 앞에선 내 페이스를 놓치는 걸까.

「이게 뭐지?」

그도 이젠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열어봐요. 뭔지」

그녀는 참을성있게 재인을 재촉했다.재인이 예쁘게 생긴 포장지를 뜯자 까만색 벨벳상자가 보였다.

그안에 사파이어처럼 보이는 보석이 세 개가 나란히 박힌 넥타이핀이 들어 있었다.

「맘에 들어요?」 그녀가 약간 긴장해서 선물상자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응. 그런거 같애」 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다니? 난 그거 고르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도로 내놔요. 」

다현은 그 넥타이 핀을 고르느라 진짜 고민을 많이 했다.

현진과 발이 아프도록 돌아다녀서 고른 물건이었다. 워낙 어마어마한 집안 아들이란 걸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미묘한 관계의 남자에게 뭘 선물해야 하나 정말 고민고민해서 결정한 선물이었다.

재인은 아무거나 대충 고르기엔는 좀 신경쓰이는 사람이었고 더욱이 처음엔 좀 삐딱하게 시작하기는 했지만 진지한 교제를 하는 사이였다.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로. 지나친 관심이 노출되지 않을 만큼. 언제부턴가 그와의 만남을 기다리기 시작한 그녀의 내심을 들키지 않도록.

그 정도의 적당한 선물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현이 눈을 부라리며 도로 내놓으라고 손을 내밀자 재인이 얼른 상자를 치웠다.

「아냐. 맘에 들어」

그의 반응에 기분이 조금 풀린 다다가 자세를 바로했다.

「이쁘지요? 어울리는 넥타이도 있었는데 흑심품었다고 할까봐 관뒀어요」

「흑심?」

「그거 몰라요 ? '넌 내꺼야'라는 표시래요. 넥타이 선물은」

「난 그런거 우리 사무실 여직원들한테 가끔 받는데.」

기조실 직원은 아니더라도 - 하기는 기조실 직원이래봤자 여직은 유경 하나밖이지만. SH호텔 직원로부터 가끔 넥타이나 라이터 같은 것들은 선물로 받아왔다.

뭐 가끔식은 쵸코렛이나 사탕도.

「받으면 뭘해요. 의미도 모르는데」

「누가 그런 소릴 하는데 ?」

그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반 애들이요. 」

그녀에겐 그게 모든 질문에 답이라는 듯 경건하게 답했다. 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다음부터는 넥타이도 같이 달라구」

재인의 요구에 다현은 예의 그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많이 받는다면서요.」

재인은 저녁시간 내내 다현을 졸라랬다.

「아직 한 이틀 정도 남았으니까 넥타이도 마저 달라고. 」

「거참, 자꾸 왜 이래요. 자꾸 이러면 그것까지 뺏을 거에요.」

그녀가 집으로 가는 차안에서 인상을 썻다.

「그래도 생일선물은 원하는걸 주는게 최고라구」

「주는대로 받는 것도 예의에요. 애처럼 자꾸 징징대지 말아요.」

이 고집불통 다현은 단호했다. 그는 왜 갑자기 이 여선생한테 넼타이를 선물로 받고 싶은 맘이 마구 생기는지 자신도 잘 몰랐다.

「우리 야외로 나가자.」

재인이 포기한 듯 이야기를 다른 데로 돌렸다.

「지금말이에요?.」

그녀가 장난치듯 물었다. 차안의 시계는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현의 집안이 보수적이어서인지 아니면 다현의 성격 탓인지 다현은 열 시가 무섭게 집으로 향했고 조금이라도 늦을 것 같다 싶으면 집으로 전화하기 바빳다.

조금은 늦어도 상관없을텐데. 그녀와 함께 있으면 어느새 시간이 흘러가고 만다. 다현의 철저한 시간관념은 재인으로 하여금 아쉬움과 서운함을 함께 갖게 한다.

스스로에 대한 짜증과 함께.

「지금도 좋구.」

그가 킥킥거렸다.

「일요일날 가자. 사람들 없어서 한가할텐데」

「이번주요?」

이번주엔 엄마와 약속이 있다.

옷 한 벌과 밥 한 끼.

「음... 다음 주는 어때요?」

「이번 주는 왜 안되는데 ?」

다현의 집 근처로 들어서며 물었다.

25

「약속 있어요」

그녀의 간단한 답변에 재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약속이요.」

재인의 그 말없는 질문에 다현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러게 무슨 약속?」

그가 길모퉁이에 차를 세우고 얼굴을 바로했다

「내 약속이요」

그녀는 생긋 웃었다.

여우가 따로 없다니까 저렇게 생긋생긋 웃어가며 잘도 빠져나가지만 이젠 그 수법을 알 것도 같다.

어쩐지 그녀의 약속이 처음 만난 날 그때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그 상대방이 누구냐니까 ?」

「상대방이 있는 줄 어떻게 알아요? 집 식구랑  같이 있을 수도 있고 혼자 쇼핑할 수도 있는데 」

그녀가 다시 생글거렸다. 저 수법엔 또 안넘어간다.

「그럴거면 얘길 했겠지.」

어림없다는 투다.

「그만 가자구요. 재인씨」

다현은 여전히 웃어가며 집에 가자고 재촉했다.

「누구냐니까 ?」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그는 계속해서 그 질문만 해댔다. 아무튼 이 남자도 고집 불통이라니까

「나 여기서 걸어가요 ?」

그녀가 딴청을 피웠다.

「글쎄 누구야 ?」

그가 약간 소리를 높였지만 다현은 그저 다시 생글거릴 뿐이다.

「웃지 말라구. 」

「아니 그게 왜 중요해요.」

할 수 없다는 듯 다현은 재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중요하지 않으면 왜 얘기하지 않는 거야. 어떤 자식인지 ?」

「이러지 마요. 바람난 와이프 추궁하듯이 내게 얘기하지 말아요」

그녀가 강경하게 맞섰다.

「얘기 안하는 이유가 그런 기분 때문에 찔려서 그런 거 아니야? 」

「아니에요.」

그녀는 딱잘라 부정했지만 내심 뜨끔하는 마음이었다. 재인을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엄마가 권하는 남자를 또 보는 일은 어째 양다리를 걸치는

기분이라 좋지 않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날 만나면서 딴 놈 만날 생각은 말라구. 」

재인이 으르렁거렸다.

「이번 주는 어쩔 수 없다구요. 그리고 처음부터 그런거 간섭 안하기로 했잖아요.」

다현이 약간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이번 주에 그 자식 만날 생각이야 ?」

「어쩔 수 없다구요. 이건 재인씨가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에요.」

「이거 왜 이래?. 결혼을 전제로 만나기로 한 남자 앞에서 지금 딴 자식 만난다고 하는 게 말이 돼 ?」

「진지한 교제였어요.」

다현이 말을 바로잡았다.

「이거나 저거나. 다다는 나 안만나는 날엔 매일 그렇게 딴 짓하고 다녀 ?」

「그럼 당신은 맨날 나만 바라보고 딴 여자들하고 밥 한끼 안먹었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다현이 역습하고 나서자 어제저녁 윤서네와 저녁식사를 한 재인은 찔금했다.  역시 그녀는 예리하다. 하지만 윤서나 주희는 동생이나 만찬가지 아닌가.

「재인씨 내 사생활이라구요. 이건. 처음 만난 날 얘기했지요?  당신이 내게 100% 정직하지 않듯이 나도 내 사생활을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다구요.」

다현이 냉정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내가 다다한테 얘기 안한 건 집안문제랑 회사일뿐야. 난 당신등뒤에서 딴 여자 만나는 짓은 안한다구.

아니 최소한 남자, 여자 관계로 만나는 일은 하지 않았어. 이건 본질이 틀린 문제야」

「안틀려요. 나도 집안문제에요. 그리고 내가 딴 남자를 만나는 건 처음부터 재인씨한테 얘기했잖아요. 그리고...그 사람들은 한 번씩밖에 안만나요.」

「그 사람들? 한놈이 아닌 거야 ?」

다현이 달래려고 한 말에 재인이 폭발했다.

「당장 정리해.」

그가 이를 갈았다.

「처음 약속하고 틀리잖아요. 」

「약속이고 지랄이고 정리하라구.」

그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다현이 항의했지만 재인은 들은 척도 안했다.

「재인씨가 간섭할 관리가 없다구요. 나도...」

'그 상황이 맘에 안든다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

그만 재인의 입술에 막혀 할 말을 전부 잊어버렸다.

재인은 그녀가 꼼짝 못하도록 두 손으로 머리를 휘어잡은 채 키스했다.

집앞 골목길 재인의 차안에서 다현은 그의 약간 폭력적인 키스를 받고 있었다.

입안 깊숙히에서 그의 혀끝이 느껴지자 다현은 기겁을 하고 정신을 차렸다. 멍청히 있던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붙잡아 떼어 놓으려고 했지만

재인은 꼼짝도 안하고 한 손을 내려 그녀의 손목을 붙들 뿐이다. 다현이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그리고 숨도 차서. 그에게 키스받는 동안 말 그대로 질식사하고 있는 중이다.

재인은 그녀가 숨돌림 틈도 주지 않고 집요하게 키스해댔다.

키스가 계속됨에 따라 폭력적이고 거칠던 재인의 키스도 부드럽고 탐색적으로 바뀌었고 처음에 거부하던 다현의 손길은 재인의 머리카락을 감고 있었다.

재인은 다현의 입술이 주는 달콤함과 부드러움에 정신없이 집중했고 다현도 몸이 부딪히는 온기와 그의 체취,그의 입술에 깊이 빠져 있었다.

아. 키스가 이런 거구나. 이렇게 사람이 가까이 다가올 수 있구나

그와의 키스에 몰두하던 다현은 눈앞을 비추는 헤트라이트에 정신을 차렸다.

재인은 여전히 다현에게 깊숙이 입 맞추고 있었고 어느새 재인의 손은 다현의 스웨터속으로 들어와 그녀의 가슴을 더듬고 있었다. 다현은 기겁을 했다.

'이런...도대체 집앞에서 학교선생이란 사람이...지나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맙소사.'

다현의 몸이 딱딱하게 굳고 긴장하자 재인은 겨우 입술을 떼었다.

몸을 추스린 다현이 서둘러 차문을 열려고 손을 내밀자 재인은 다현을 제지했다.

「타고 있어. 집앞까지 데려다 줄테니까. 」

골목길 안에 라이트가 환히 켜졌다.

'제기랄.  내가 무슨 일 하고 있는 건지. 남의 집앞에서 여선생한테 강제로 키스나 하고 있고.'

재인은 속으로 쓴 웃음을 삼켰다. 차안에서의 도둑키스는 재인의 취미에 안맞았다.

화가 나서 쾅하고 차문을 닫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안으로 향하는 다현에게 그는 창문을 조금 열어 인사했다.

「잘 자라구. 다다. 」

정신차린 다다가 물어뜯은 탓에 입술에서는 약간 피맛이 느껴졌고 다현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 느낌까지도.

제기랄.  그는 씩 웃으며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26

「딴 남자가 있는 건 확실해?」

윤후가 맥주병을 입에 뗀 채 물었다.

「몰라. 그냥 대충 만나는 거 같기는 한데... 집안문제래. 」

아직도 다현에게 불만스럽고 심통이 난 재인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집안문제라... 」

윤후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투였다.

「집안문제...? 그럼 너랑 같은 거 아냐?」

「나랑?」

「그래, 임마. 너 너처럼 입에서 결혼하라고 상대 지정해준거 아니냐구? 그럴 수 있지? 다현씨 나이 정도면 그럴 때도 됐잖아.

너야 사내새끼니까 싫다구 툭 튀어나가지만 여잔 그러기가 쉽지 않잔아.」

「그럼 그놈이 그 자식이라구. 」

재인이 그럴 수도 있겠다 있어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임마. 말 좀 쉽게 해라. 듣는 사람 헷갈린다.」

재인의 표현에 윤후가 킥킥거렸다.

「그럼?」

「뭐가 그럼이냐. 임마 널 계속 만나는 걸 보면 그 남자한테 별 관심이 없는 거지」

「그게 아니고 난 그냥 만나는 거고 그쪽에 관심있는 거라면?」

재인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야. 이재인. 그 넘치는 자신감 다 어디로 갔냐?」 윤후가 킬킬거렸다.

「다현씨 그런 여자 아냐. 정말 너한테 관심없었다면 너한테 생일선물 사줘가며 만나는 남자 있다고 고백해서 부아 건들진 않을 거라구.」

웃고만 있던 윤후가 진지하게 말했다.

재인의 생각도 그랬다. 다현은 그럴 여자로 보이진 않는다.

아마 다른 여자였다면 그날 그 상황에서 - 재인이 흥분할 대로 한 그 상황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인을 꼬여댔으리라.

여태까지의 다현의 모습이 절대로 가식은 아니라는 데에 재인은 그의 전재산을 걸 수 있다.

재인에게 그 정도의 분별력은 충분히 있다. 최소한 진품과 가짜를 구별해 낼 줄 아는....

다현이 그에게 보여주는 친밀함과 다정함이 그 빌어먹을 유산이랑 관련된 그 계약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문득문득 재인을 불안하게 했다.

그 계약에선 10개월간 서로에게 진지하기로 했으니까.

「너 다현씨 언제 처음 만났냐?」

「글쎄...」

재인이 생각을 더듬었지만 그게 생각이 날 턱이 없다. 공식적이 스케줄이라면 유경이 알고 있을테지만 워낙 개인적인 문제라 별도로 스케쥴을 표시해 놓지 않았다.

「...한 칠월쯤이었는데..」

「잘 생각해봐. 남자는 몰라도 여자는 날짜에 민감하니까」

윤후가 재촉했다.

「애들 방학할 때쯤이었는데」

「잘 됐네. 학교에 걸어보면 알겠네.」

윤후는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날짜 하나는 기가 막힌다. 너. 칠월이면 OK다. 백일기념으로 장미를 엄청 안기라구. 」

윤후는 친구의 행운에 기뻐하며 맥주병을 부딪혔다.

「축하한다. 김재인」

「그럼 되는 거야?.」

재인이 얼굴을 지프렸다.

「임마 그쪽은 너보다 내가 선배야. 꽃 싫다는 여자 한명도 못봤어.」

「네 바람기도 쓸 데가 있었구나.」

재인이 얼핏 웃음을 지었다.

재인과 윤후가 같이 있음을 알게 된 주희는 겨우 윤서를 꼬셔서 같이 식사할 수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윤서와 주희에게 윤후는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주희는 오랜만에 재인을 독점할 수 있어서 기뻤다.

「왜 하필 재인이 오빠야? 네 또래에서 찾아 」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윤서는 재인에게 목매고 있는 철없는 친구에게 충고했다.

재인에게 관심을 준 그 순간부터 주희는 아주 꾸준하게 재인의 주위에 맴돌았다.

계획된 우연과 치밀한 사전작업으로 그녀는 재인에게 자신을 주지시켰다. 재인같은 남자에게 저돌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아무래도 위험한 방법이다.

그녀의 모든 매력을 이용하면 한번쯤은 그녀를 여자로서 대우해주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여자가 되긴 싫었다.

좀더 은근하고 치밀하게 재인을 압박해나라가리라. 일단 윤서와 함께라면 재인도 자신을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그는 가족에게는 엄청나게 잘하는 사람이니까.

「난 젓냄새나는 햇병아리들은 싫어.」

주희가 딱잘라 말했다.

「재인오빠가 널  그렇게 생각하면.」

「 네 눈엔 내가 그렇게 보이니?」

자신감있는 목소리였다.

윤서는 친구의 세련된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주희 아버지의 도움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긴 그때부터 윤서는 주희를 알아왔다.

오빠와 윤서는 주희네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

「넌 그냥 동생으로 남아있는 걸 선택했지만 난 아니야. 재인씨는 모험을 걸어볼만 남자야. 물론 네가 라이벌이 아니라 다행이지만. 」

「재인씨라....재인오빠 쉬운 사람 아닌거 알지? 옛날에 현주언니도 쳐다보지 않았어. 너라고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마.」

재인은 오빠 윤후의 둘도 없는 친구다. 어렸을 적부터 가까이에서 봐왔고 친형제처럼 따랐지만 재인도 윤후도 윤서에게 더 이상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윤서는 누구보다 현명한 여자였다. 씨도 안먹히는 곳에 공들이지 말고 그냥 동생으로 남아있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재인오빠는 적과 친구의 구분이 확실한 남자다. 어차피 내 사람이 될 사람이 아니라면 그 편이 훨씬 유리하다.

「난 재인씨가 맘에 들어.」

주희가 당당한 어조로 선언하듯 말했다.

그렇겠지. 재인오빠에겐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또래의 재벌 후대들과는 달리 훨씬 당당하고 추진력 있는,

무엇보다 두발로 혼자 당당하게 세상을 헤쳐나갈 줄 아는 남자였다.

주희의 남자 보는 안목은 아무튼 뛰어나다.

「쉽지 않을 거야. 한주희.」

「그러니까 더 재미있지. 쉬운 게임은 시시하잖아.」

「그게 아니라... 」

그녀가 고래를 갸웃거리고 고민하는 모습을 했다.

「뭔데?」

「잘은 모르지만 내가 듣기로 요새 재인오빠가 푹 빠진 여자가 있대.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오빠는 싱글거리며 대충 그 정도만 얘기했다.

'자식이 버티더니 드디어 임자 만났다. 완전히 푹 빠졌어. '

「재인씨 주위에 여자는 항상 있었어 소문도 그렇고

주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그때는 당연히 그런 줄만 알았다.

27

「어서 와라.」

다현은 집에 들어서자 온가족이 모여 있었다. 다현은 가방 대충 집어던지고 식탁에 합류했다. 오랜만에 한가족이 다 모인 저녁식사는 오붓하고 즐거웠다.

서현의 의젓함. 준현의 유쾌함. 그리고 부모님의 자랑스러움이 함께 묻어나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래 서현아, 너도 좀 일찍 들어와. 식구들 다 함께 밥먹은지가 언젠지 모르겠다. 아이구 오늘은 현진이가 못왔네」

「엄마. 제가 일부로 늦어요. 난 아직 병원에서 신참이야. 나처럼 똑똑한 애가 십 년을 공부했는데 멀었대. 현진이 걘 아직도 멀었구요. 인턴은 사람도 아니에요.」

서현이 그 잘생긴 얼굴을 장난스럽게 찌프렸다.

「 넌 전문의까지 땄고 현진이 걔가 얼마나 공부를 열심하는데 그런대니?」

「그래도 오빠랑 현진인 신경이 무디니까 엄마가 걱정할 필요 없어. 둘 다 아무생각 없잖아」

다현이 엄마를 위로하느라 농담을 던졌다.

「원래 뭘 좀 하는 사람은 아무 생각 없는거야. 집중력, 그거라구. 누나처럼 잔머린 안굴리지, 좀 약아야지」

준현이 뼈있는 농담으로 받았다.

「잔머리? 너 그게 누나한테 할 소리야.」

다현이 막내를 노려봤지만 그 녀석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꼬리가 드러난단 말야. 다다 누나. 좀 있으면 누나의 정체를 엄마도 알걸.」

준현이 마지막 말은 다현의 귀에게만 들리게 속닥였다.

다현이 뭐라고 한마디 대꾸할 때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렸다.

집전화가 아닌 걸 깨달은 서현이 서둘러 핸드폰을 찾아 일어섰다.

「젠장 오늘 off라고 했는데...할 수없다니까...어, 내거 아니잖아」

서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어디서 울리는 거야 ?.」

그때서야 다현이 기겁을 했다. 「내 가방...내꺼야.」

다현이 소파 위에 대충 던져진 가방을 뒤적거리자 의심스러운 눈초리와 궁금한 질문들이 그녀를 쫓았다.

「어쭈~ 이다다. 핸드폰도 있으셔」

「누나 그거 쓸 줄은 알아?」

「아니 너 그거 언제 산거니?」

「노코멘트 」

그녀가 식구들은 향해 한꺼번에 답변하면서 전화기를 들고 이층으로 향했다.

「이다다. 너 연애하냐?」

서현의 놀리는 음성이 들려왔지만 다다는 전화기 속의 사람이 행여 가족에게 노출될까봐 무시했다.

「형은..그럴 리가 없어. 현진이 누나라면 몰라도. 다다 누난 여우라고.」

그녀는 준현의 말도 무시했다.

임마. 현진인 나보다 더한 여우라고, 시간만 있으면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런 위협은 겪고 싶지 않다. 남자한테서 전화가 온다면 우리집 식구들이 그냥 둘 리가 없다.

「이재인씨, 무슨 일이에요?.」

다다가 씩씩거리고 상대방이 뭐라 하기도 전에 쏘아 붙였다.

맙소사 엄마가 눈치라도 챈다면 난 꼼짝없이 시달려야 한다.

「어. 난 줄 어떻게 알았어 ?.」

「핸드폰 번호 아는 놈팽이가 당신밖에 없거든요.」

차가운 어조였다. 하직 화가 안풀린 모양이다.

「그거는 기쁘기는 한데... 난 놈팽이가 아냐. 다다」

「어쨋거나요.」

여전히 차가운 어조였다.

「왜 이렇게 심술이 났나.」

재인은 다현이 화난 걸 무시하고 그녀를 달랬다.

당신은 타이밍 맞추는데 소질이 없어요」

전화기속의 그녀가 짜증을 냈지만 재인은 오랜만에 듣는 다현의 목소리에 기분이 좋았다.

거기다 그녀는 망설임없이 재인의 이름을 불렀고 그 사실이 흐뭇했다. 얼굴 못본지 벌써 일주일이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화내지 말라고. 지금 뭐하고 있어?」

「전화받잖아요.」 그녀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특별히 하는 일이 내 생각하며 전화받는 거면 내려와요.」

「당신 생각 안해요.」

그녀가 소리를 꽥 질렀다. 다현은 그동안의 속마음을 재인에게 들킨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아무튼 이 남자는 눈치하나는 엄청 빠르다니까.

사실 키스는 열심히 해놓고 이제 와서 화내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지만 다현을 설득하는 재인의 방법이 그녀는 맘에 들지 않았다.

앞으로 타협 안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정신없이 키스를 해대면 어쩌란 말이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주입시키면서 그를 보고 싶은 맘을 꾹 참고 있었다.

「이것 봐. 다다. 소리 그만 지르고 내려와」

「뭐라구요?」

그녀는 소리지르느라 내려오라는 얘길 듣지 못한 모양이다

「대문 앞으로 내려오시라구요.」

재인이 세 번째 얘기했다.

「왜요?」

「내가 그 밑에 있으니까」

「미쳤어요? 여길 왜 와요 .」

그녀는 기겁을 해서 자신도 모르게 작게 속삭였다.

「내려올거요, 말꺼요」

「이것 봐요. 이재인씨」

「아님 내가 올라가고.」 재인은 느긋한 어조였다

「알았어요. 내려갈게요.」

다현이 재인의 고집에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고집세고 거만하고 거기다 제멋대로에요」

「고마워, 나도 한 번은 다들은 칭찬이야.」

재인의 킥킥거리는 웃음이 들려왔다.

「거기다 시간감각도 제로예요」

다현이 쏘아붙였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요.」

다현은 집안 식구의 흥미로와하는 시선과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무시했다.

「잠깐이면 되요.」

「만약에 이유가 남자 때문이라면 천천히 와도 된다.」

서현이 키득거리자 다현은 오빠를 흘려봤다.

「일찍 들어올 거야. 」

이것 봐라. 그의 특별하게 똑똑한 동생은 남자 때문이 아니라고 부인하지 않았다. 그럼...

28

「도대체 여기엔 왜 왔어요.」

다현이 차옆에 서있는 재인을 보자마자 쏘아댔다.

「화내지 말라구」

오랜만에 보는 다현을 보고 재인이 웃었다.

「지나가는 길에 들렸다고 얘기 말아요. 방향이 틀리니까」 그녀가 여전히 씩씩댔다.

「난 서울이랑 인천을 헷갈리진 않는다구 그런 변명을 하기엔 난 나이가 더 들었다구」

「그럼 왜 왔냐구요 ?」

다현은 그말 밖에는 모르는 사람처럼 여전히 몰아댓고 재인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쉽진 않겠지만 윤후 말대로 해보는 수밖에 없다.

「이거 주려구.」

재인은 차 트렁크에서 손으로 잡을수도 없을 만큼의 장미를 다현에게 안겼다. 다현이 두 손으로 그러잡아야 할만큼 많은 장미였다.

「와.  너무 예뻐요.」

재인은 윤후의 방법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잠시 재인에 대한 심술을 잊고 있었다.

「잠깐 타라구.」

재인이 그녀를 향해 문을 열어주었다.

다현은 올라타다 잠시 머뭇거리고는 장미꽃 너머로 재인을 쏘아보았다.

「딴짓 안할거지요 ?」

「안한다구. 오늘은.」

재인은 웃으며 부정하고 그녀를 태웠다.

「이게 웬장미에요. 」

그녀는 뒷자석에 놓은 장미 다발에서 몇 송이를 빼들고 향기를 들이마셨다

「너무 얼굴 갖다대지 마. 가시 있어서 얼굴에 상처나.」

재인이 큰길로 차를 빼내며 다현에게 주의를 주었다.

「괜찮아요. 차안에 향기가 가득하지요. 기분이 넘 좋다.」

다현이 약한 건 그의 학생과 장미인 모양이다.

「밥 먹었어? 」

「그럼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그녀는 시계를 찾느라 또 두리번거렸다.

「벌써 여덟 시라구요. 밥 안먹었어요?」

「일찍 나온나고 나왔는데 주말이라 길이 막히더라구.」

재인이 약간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밥먹자구요.」

그녀가 서둘러 얘기하자 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요?」

「우린 만나면 밥먹자는 게 인사야. 이렇게 본능적으로 만나는 사이도 드물 거야.」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다. 왜 항상 이 남자하고는 어느 한쪽이 배가 고파야 만나는 관계일까 ?

언제나 밥 먹으러 가는게 코스가 되어버렸다.

월미도는 주말인데도 그리 사람이 붐비지 않았다.

「밥 안먹었다면서요?」

재인이 안내하는 레스토랑으로 들어서며 다현이 재인을 바라봤다. 재인은 밥 선호주의자였다.

레스토랑의 양식음식을 그가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는 것을 다현은 알고 있었다.

「한낀데. 뭘. 그리고 나 혼자 먹으려면 간단한게 좋아. 다다도 좀 먹을래?.」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피자 좋아해요?. 」

「가끔은 먹지. 왜 피자 먹고 싶어?」

재인이 다현을 향해 말했다.

「아뇨. 이 집은 바깥풍경이 근사한 대신 음식 맛을 별로에요. 하지만 피자는 먹을 만해요.」

그녀가 작게 얘기했다.

「그리고 나도 한 조각 정도는 먹어드릴 수 있어요.」

「그러지 뭐.」

재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끼어보라구.」

재인이 피자를 기다리는 동안 다현에게 불쑥 반지상자를 내밀었다. 겉보기에도 근사한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단순한 모양의

반짝이는 작은 보석이 하나 박힌 금반지였다.

「이게 뭐에요? 오늘 무슨 날이에요. 아까 장미도 그렇구...」

그녀가 재인의 얼굴을 살폈다.

「이런 날은 여자가 챙긴다는데. 오늘이 우리 백일째 되는 날인걸.」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오늘이요?. 벌써 그렇게 되었어요 ?」

「끼어 보라구」

재인이 재촉했지만 다현은 좀 머뭇거렸다.

「맘에 안들어?」

재인은 윤후가 재차 경고한 대로 그리 비싸지 않은 단순한 모양의 금반지를 선택했다. 맘 같아서야 지금당장이라도

결혼반지를 손에 끼어주고 싶었지만 윤후는 신신당부했었다. 그냥 편한 반지로 선물하라고. 윤후 말로는 비싼 건 안겨줘봤자 경계심만 일으킬 뿐이란다.

「아니요. 예뻐요.」

재인의 조심스러운 어투에 다현이 얼른 고개를 저었고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반지를 손가락에 끼었다.

「맞아?.」

재인은 이 반지를 고르느라 백화점 아가씨와 거의 한시간 가량 실갱이를 했다. 그녀의 손가락 크기도 그녀의 취향도 그리고 반지라고는

한번도 구입해보지 않은 그의 무지 때문에 백화점 종업원은 반지 두 개를 파느라고 한시간을 매달렸다.

「약간 큰거 같은데. 그래도 맞아요. 난 좀 헐렁한게 좋거든요.」

그녀는 반지를 끼고 손을 약간 들어보였다. 재인을 보여주기 위해.

「괜찮아요?」

「예쁜데.」

재인은 스스로의 안목에 기분이 좋았다.

「근데...」

「근데 뭐? 」

재인은 다현을 바라봤다.

「혹시 흑심있는 건 아니지요 ?. 」

「무슨 흑심?」

재인은 약간 뜨끔했지만 그냥 밀고가기로 했다.

어차피 그는 사업하는 사람이다. 약간의 미끼에 약간의 이득을 얻는 것.

「넥타이 같은 흑심이요. 우리반 애들이 남자한테 반지 받을 땐 조심 하라고 했거든요.」

조그만 녀석들이 별걸 다 아는군. 요새 애들은 나보다 나은 모양이다.

「결혼을 전제로 한 진지한 교제야. 반지는 당연하다구.」

「그런가요? 난 아닌 것 같은데.」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반지에 팔려 그리 신경을 안쓰는 모양이었다. 기회가 좋군.

「사이즈를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는 여전히 반지를 보느라 눈을 떼지 않았다.

「운이 좋았어.」

정말 운이 좋았다. 혹시 몰라서 그는 한 개를 더 사둘까 했는데 그 백화점 아가씨가 흘겨보는 통에 손을 놓았다

「맘에 드니? 」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사실 이런거 안좋아는데 이건 되게 예쁘네요.」

「나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니데 ...나도 맘에 들어」

「예?」

그녀가 드디어 반지에서 눈을 떼고 재인을 바라봤다.

「젼혀 나한테 관심이 없군. 나도 좀 봐달라구.」

재인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

그녀는 그제서야 재인의 반지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했다.

「커플링이었어요. 이거」

「그럼」

재인은 당연하다는 투다.

「빼지 말라구.」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고 뭔가 이야기하려고 할 때 때마침 주문한 피자가  나왔다. 오늘은 진짜 운이 좋군.

「어서 먹어요. 」

그녀가 접시위로 피자를 올려주며 얘기했다.

「다다도 먹으라구.」

「먹긴 먹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기지 들어봐야 겠는데요.」

그녀가 반지를 돌리며 재인을 주시했다. 이 젊은 여선생은 처음부터 그냥 순순히 물러나는 법이 없다. 알고 시작한 일이니 할 수 없다.

「나 배고파」

「먹어요. 근데 그냥 넘어갈 생각은 말아요. 재인씨가 나한테 주식말고 뭐 바라는 거 있어요?.」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아주 담담하게 얘기했다.

그놈의 주식은 아직도 문제가 된다. 빌어먹을 안되겠다. 다다는 대충 넘어가기엔 너무 똑똑하다.

「나 지금 무지 배고파.」

그가 피자를 내려놓고 다다를 직시했다.

「그러니까 빨리 얘기하고 얼른 먹자구」

그녀는 재인의 먹다만 피자를 쳐다봤다. 이 시간까지 밥도 챙기지 못한 사람인데... 밥부터 먹여야겠지

「얼른 먹고 빨리 얘기하자구요. 일단 먹자구요.」

그녀가 싱긋 웃었다.

29

「난 서른 둘이고 틀림없는 총각이야. 」

「그런데요?. 」

별로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니다. 그건 전부 아는 얘기니까

그녀가 어깨만 으쓱한 채 눈을 깜박였다.

「주식얘기도 유산 얘기도 특히 그 빌어먹을 계약 얘기는 집어치우자구. 나말고 교제하는 놈 있어?」

그의 고약한 언변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은 그런 사람 없는데요. 당신말고는.」

「좋았어. 나도 그렇다구.」

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현은 참을성있게 고개를 끄덕이고 재인과 그녀의 컵에 콜라를 따랐다.

「그래서요?. 」

「그럼 우리가 결혼 못할 이유가 없겠지.」

재인은 확실하게 마무리했다.

「뭐요?」

다다가 마시던 콜라에 숨이 막혀 콜록거리자 재인이 할 수 없다는 듯 냅킨을 꺼내주고 물을 건네 주었다.

「괜찮아?」

「네...아니...안괜찮아요...음.. 그게 무슨 뜻이에요? 」

그녀가 눈이 둥그래진 채 물었다.

「결혼 안한 나이찬 젊은 남녀가 진지하게 만나는데 결혼하면 안되는 이유가 어디 있어?. 」

재인은 느긋하게 피자를 잘라먹고 있었지만 그의 난데없는 발언에 다현은 손을 놓고 있었다.

「결혼한다구요? 우리가」

다현이 손가락으로 자신과 재인을 번갈아 가리켰다.

「응. 당장은 말고 내년 초에 하자.」

내년이래봤자 두 달도 안남았다.

「난 안해요. 」

난 결혼같은거 하기 싫다구. 우리엄마 결혼공세에 난 무지 피곤하다고. 근데 이 남자가 결혼을 하자니...어려서부터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특별함을 스스로 깨달았을 때부터.

「왜? 내가 싫어 ?」

재인도 접시를 멀리하고 다현을 바라봤다.

「아니요. 그런게 아니에요」

그녀가 험상궂은 재인의 얼굴을 보고 급히 부정했다.

「아니면?」

재인은 인상을 긋고 있었다.

「난요...」

그녀가 침을 꼴깍 삼키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재인씨가 잘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요.」

그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딴 남자 없다구 그랬잖아. 」

그가 소릴 질렀다.

「좀 조용히 해요.」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며 속삭였다.

「딴 놈 만나는 거야 ?」

그가 겨우 소리를 죽이고 다현을 노려보며 을러댔다.

「딴 사람 없어요.」

그녀는 이 남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딴 사람 없어요. 재인씨도 안 싫구요. 근데 난 결혼은 싫어요.」

그녀가  다시 딱부러지게 설명했다.

「왜 ?」

다현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재인씨는 왜 하고 싶은데요?」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바보가 되리라.

그리고 재인도 그녀를 확실하게 사랑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니 그녀뿐만 아니라 사랑이 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있고 싶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오늘 하루종일 잘 풀리던 일이 이상하게 꼬이고 있다.

다다의 독신선언은 계획에 없던 일이다.

몰론 그의 청혼도 충동적이었고. 더더군다나 사랑은 생각지도 않은 일이다.

「나도 잘 몰라. 어쨌거나 난 할거야」

「나랑요?」

그녀가 의문스러운 표정이다.

「응. 」

그것만은 확실하다. 재인은 다다와 결혼하고 싶었다.

재인은 확실한 대답에 이번에 다현이 한숨을 쉬고 뭔가를 얘기하려 했지만 재인이 막았다.

「이것 보라구. 또 노를 할거면 생각 좀 하고 대답해. 자꾸 안한다고 하면 난 더 하고 싶으니까.」

「그치만...」

「일어나자. 벌써 열 시 반이야. 조금만 있으면 다다는 쫓겨나서 할 수 없이 나한테 시잡와야 돼.」

재인은 그녀를 집에 들여보내기가 아쉬워 집 주위를 두 번이나 맴돈 끝에 차를 세웠다.

「이번주 일요일날 또 그 자식 만나?」

재인이 문을 열어주기 전 다다를 붙들고 얘기했다.

「이젠 안만나요.」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당분간 대학원 진학을 핑계로 엄마의 공세를 막아볼 생각이자만 자신은 없다. 하지만 시도는 해봐야겠지.

「당분간은요...」

「당분간이라.」

뭐, 그 당분간 안에 결혼해버리면 끝이니까.  이미 재인은 마음을 굳혔다.

「그럼 일요일날 다섯 시에 데릴러 올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그렇게 일찍요?」

그녀가 기겁을 했다.

「여기까지 올려면 난 한 시간을 더 서둘러야 해. 한 집에서 살든지 해야지 원.」

「뭐요?」

「아가씨 잘주무시고 낼 모레 보자구요. 」

재인은 인상쓴 다다를 무시하고 웃기만 했다.

30

재인은 손가락의 반지를 돌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왜 그 순간에 다다와 결혼을 하겠다고 얘기했는지 본인도 아직 잘 모르겠다.

그는 이제 서른 둘이지만 나름대로 살아가는 스타일이 정해져 있는 편이다.

절대로 무모하지도 충동적이지도 순간적이지 않는 사람이 그였다.

어려서부터 그는 체계적으로 교육받았고 밑바닥부터 단계적으로 학습해서 현실적인 인물로 키워졌고 그도 그쪽이 훨씬 스스로에 어울린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어제는 어째서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충동적인 말을 해버렸을까.

결혼이라구? 다다도 싫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썩 내켜하지 않는 제도였다.

그 귀찮은 걸 왜 내가 선뜻 해보자고 얘기했을까. 왜일까?

이렇게 6개월만 지나면 그 뒤엔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데 어쩌자고 난 새로운 문제를 만드는 걸까.

김다현.  젊은 여선생. 보기보다 소신있고 다른 사람보다 자의식이 강한, 그래서 콧대도 만만치 않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우같이 싹싹한 구석이 있는 보수적인 학교선생. 그리고 고집덩어리.

아마. 그녀와 함께 살면 심심하지는 않겠지.

아서라. 그것말고도 세상은 얼마든지 재미있을 수 있다고.

아니야. 어쩌면 괜찮은 일일 수도 있다구. 그녀와 결혼하면 ...

결혼 안한 지금도 충분히 괜찮다고 ....

시작하면 틀릴지도 몰라. 이 반지처럼.

재인안의 재인이 계속해서 속삭였다.

처음엔 가깝하고 귀찮기만 하더니 이젠 제법 익숙해져 있는 이 반지처럼.

재인이 얼굴을 찌푸리고 손가락의 반지를 만지작거리자 유경은 궁금해졌다.

전에 없던 반지야. 우리실장이 반지를 낀다? 저건 어떤 의미일까 ?,

왜 저렇게 인상을 박박 써가며 반지를 쳐다보는 걸까.

하지만 그녀의 실장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네가 시작한 일이라구. 이재인. 할아버지가 판을 벌이기는 했지만 시작한 건 너라구.

이대로 모른 척 몇 개월 지낼 수도 있는데 굳이 싫다는 여자 꼬여대 결혼하려는 심사는 도대체 뭐야.

새삼스럽게 결혼하고 싶어 안달하는 이유가 뭐냐구. 왜 다다냐구.

이런 제기랄. 갈수록 답이 안나오는군.

「그래서 이게 그 반지야 ?. 」

현진은 다현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서 훑어 보았다.

「으음. 괜찮은데.」

현진이 반지를 요모조모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이쁘지? 」

다현은 현진의 코앞으로 얼굴을 드밀었다.

「음... 예쁜 것도 예쁜 거지만 난 이 안의 다이아몬드가 더 맘에 드는데」

「응? 이게 다이아몬드야?.」

「그럴 줄 알았어. 뭔지도 모르고 그냥 받았겠지. 3부 정도는 되겠다. 안될래나? 」

「그럼 어떡해? 」

「야. 다다. 겨우 병아리 눈물만큼도 안되는 다이아 하나 박힌 반지 받았다고 해서 큰일 나는 거 아니야.」

현진은 자신보다 훨씬 현실성 떨어지고 실물에 느린 다현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 둘은 여러모로 보나 전혀 달랐다.

다현이 적당한 키에 젖살이 아직 빠지지 않은 통통한 볼, 부드러운 몸짓의 가냘픈 몸을 하고 있는 데 비해
현진은 타고난 우아함과 섹시함 그리고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함을 가지고 있었다.

「맘에 든다며. 너 이런거 안좋아하는데 이건 맘에 드는거 아니야. 그럼 하구 다니면 되지. 거기다 네가 하고 다니면 아무도 진짜로 안봐. 」

다현이 현진을 흘겨보았다. 길고 가는 손가락을 하고 있는 현진에 비해 다현의 손은 아기 손을 연상시킬 정도로 작고 올망졸망했다.

「또 공부를 하겠다니까 엄마는 뭐라셔?. 」

「뭐, 엄마야 공부하는 건 반대하시지 않으니까.」

「여하튼 핑계도 없다. 그렇게 공부하는거 싫어했으면서 겨우 생각해낸게 공부냐. 그 좋은 머리로」

현진이 혀를 찼다.

「그럼 어떡해. 재인씨 펄펄 뛰지, 엄만 매일 같이 선보재지.」

「그럼 재인씨를 소개하면 되잖아.」

현진이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게 답을 냈다.

「너, 몰라서 그래?  그랬다간 당장에 난 시집가야 한다고.」

현진은 분개하고 있는 다현을 보고 다시 한숨을 쉬었다.

언제간 이 친구의 특별함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 게다. 현진은 그 사람이 재인이었으면 한다.
지금 다현은 애써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친구가 남자에게 관심을 갖는 일은 그녀가 알기로는
처음이다. 상처같은 거 받지 않도록 다현의 처음 사랑이 잘 되었으면 한다.

「이 추세로 가다간 내가 먼저 결혼하겠다. 나 시집간 다음에 너 혼자 남으면 심심해서 어쩔려구 그러니?」
현진이 걱정스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 걱정 마라. 너 곧 있으면 시집갈 것 같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다현의 빈정거림에 현진이 눈이 커졌다.

「응. 엄마가 아무래도 타겟을 너 쪽으로 바꾸실 것 같아. 딸내미 둘다 안가면 안되다고, 너라두 먼저 보내야겠다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어삼키곤 얼굴빛이 변한 친구를 보고 생글거리고 웃었다.

「뭐?」

현진이 기겁을 했다.

「요즘 엄마가 너 선전하고 다니잖아. 좀 있으면 신랑감 명단을 줄줄히 꿰고 있으실거야.」

「으악~ 안돼, 나 낼 아니 오늘부터 응급실 가게 될 것 같아.」

「나한테 얘기하지 말고 엄마한테 말해.」

그녀가 여전히 웃으며 현진에게 마지막 칼날을 박았다.

31

「다현아 오늘 오빠한테 좀 갔다 와라.」

「오빠 갈아입을 옷이야 ?」

그녀는 엄마가 챙기는 가방을 흘끗보고 말했다.

「도대체 전문의까지 있는 애를 집에 안들여보내고 부려먹을 수 있는거니 ? 」

엄마가 투덜댔지만 다현은 빙긋거리기만 했다.

잘난 큰 아들. 대단한 아들에 대한 엄마의 자랑 방식이다.

「그러지 뭐.」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재인과는 내일 만날 예정이지만 오늘 전화한다고 해서 특별히 나쁠 일은 없으리라.

하지만...이래도 되는 걸까. 이렇게 그 남자한테 빠져도 괜찮은 걸까.

잠시 이성이 고개를 들어 갈등했지만 다현은 어느새 그의 전화를 누르고 있었다.

「이재인입니다.」

재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다에요.」

「응. 왠일이지 ? 전화도 다해주시고」

재인의 기분좋은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 뭐 할 거에요?.」

「일 해야지」

「그래요 그럼 화장한 토요일 오후 열심히 일하세요.」

재인의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다가 특별히 요청하면 계획을 바꿀 수도 있어. 」

「일 없네요. 난 근사한 곳에서 괜찮은 남자 만날 계획이었는데 」

「딴소리 마. 내가 내려갈까 ?」

어느새 재인의 발끈한 목소리였다. 아무튼 이 남자는 소유욕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거야.

「제가 올라가지요. 뭐. 특별히 제게 시간을 내주신다면」

「다다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내야지. 근데 나 잠깐 병원에 들려야 하는데...」

「병원이요? 어디 아파요?」

다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인은 빙긋 웃음지었다.

그의 작은...어머니가 입원중이시다.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병실을 찾았다.

오늘 내일이면 퇴원하실텐데...

「내가 아니고 누가 좀 입원해 있어서」 재인은 대충 시간을 꼽아봤다.

「무슨 병원인데요 ?」

재인이 말한 병원은 오빠가 있는 곳이다. 그쯤에서 대충 만나면 될 것 같다.

「그러면 그 근처에서 만나요」

다다가 선뜻 제안하자 재인은 서둘러 근처의 커피숖 이름을 불렀다.

「병원 맞은편 빌딩이야. 찾을 수 있겠니?」

겨의 애들 수준으로 걱정으로 하고 있다. 다다는 한숨을 쉬었다

「못찾으면 핸드폰으로 연락할게요.」

「좋아. 거기서 보자.」

재인이 기분좋게 전화를 끊자 기조실 식구들은 또다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오빠 엄마가 전문의 맞냐구 물어보래」

서현에게 옷가방을 건네주고 다현이 장난을 걸었다.

「너 안봤어 ?. 아까 나한테 구십도 각도로 절하는 애들.」

서현은 다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간호사들도 나한테 전부 갔다는 거 아니야. 」

「아까 그게 절한 거였어 ?. 난 몰랐지」

그녀가 코웃음치자 서현이 그녀의 머리를 흩뜨렸다.

「야! 김다현. 둘도 없는 오빠 기좀 살려주면 안돼냐.」

「엄마랑 준현이가 충분히 살려주고 있는 것 같은데. 」

그렇지만 아무리 오빠라도 ...그녀는 서현을 아래위로 훑어봤다.

오빠는 객관적으로도 정말 근사한 남자였다.

180cm가 넘는 큰 키에 잘빠진 몸에다 너무 반듯해서 질릴 것같은 이목구비는 곱게 쌍커풀진 맑은 눈과 표정을 숨길 정도의 긴 속눈썹이 조각같은 하얀 얼굴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윤기있는 짧은 머리카락과 당당한 몸놀림. 실력있는 외과의답게 그는 손가락까지도 길고 고운 나무랄데 없는 남자였다.

거기다 엄한 가정교육을 통한 완벽한 예절이 몸에 배어 있어서 친절하고 호감있는 전도가 유망한 청년으로 병원에서도 여러 사람이 손에 꼽고 있는 신랑감 1순위였다.

오빠랑 가다보면 길가는 모든 여자들이 한 번씩은 쳐다보고  그녀가 있음에도 추파를 보내는 여자가 한둘이 아니다. 그녀는 그런 서현의 팔짱을 가깝게 끼고 미소지었다.

재인은 눈에서 불이 날 지경이었다.

도대체 눈앞의 사실이 현실로 믿어지지 않는다.

저녀석이 다현이 나몰래 만나고 다니는 그 자식인가.

다다는 단 한번도 내게 저만큼의 친밀한 접촉과 무방비한 신뢰를 보여준 적 없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오른 그는 다다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다현이 미쳐 알아채기도 전에 그녀를 서현에게서 홱 끌어당겨 그의 품에 안았다.

32

서현에게서 홱 끌어당겨 그의 품에 안았다.

「미안합니다. 의사 선생, 난 와이프랑 할 말이 있어서」

그가 특유의 고압적인 목소리로 차갑게 내뱉었다.

서현은 난데없는 재인의 등장에 눈만 멀둥거릴 뿐이었고 다현은 기가막혀서 할말을 잃었다.

맙소사. 와이프라니

「지금 이분이 댁의 부인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이제 제 페이스를 찾은 서현은 아직 놀란 표정인 다현을 흘끗 쳐다보고 물었다.

「그렇소. 가자.  다다야」

재인을 완전히 무시한채 그녀의 어깨를 돌려 세웠다.

'다다라구 ?. 이거야. 원 그럼 정말 생판 모르는 남은 아니군'

서현은 차갑고 고압적인 얼굴로 다현을 끌고가는 재인을 보고 혼자 미소지었다.

「이것 봐요. 재인씨」

정신을 차린 다현이 재인에게서 벗어나려하자 다현의 어깨를 꽉잡은 재인은 인상을 박박 그으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이다다. 경고하는데 입 다물어. 이따 얘기하자구. 저자식 없는 데서」

「저자식이라뇨 ?」

다다가 발끈하자 재안이 더 험상궂은 얼굴로 노려봤다.

저자식이라니 ? 누구보고 저자식이래.

「아무말도 하지 말라구. 당신이 말한 괜찮은 남자에 대해서 나도 듣고 싶은 얘기가 많으니까 」

재인은 다현이 무슨 말이라도 할 틈도 주지 않고 이를 갈 듯이 내뱉고는 그녀를 끌고갔다.

'뭐 이런 남자가 다있어. 나중에 손이 발이 되도록 빌 때 보자구'

재인은 너무 화가 나 머리꼭지가 돌 지경이었다.

그때 그 젊은 의사가 어느새 쫓아와 재인의 어깨를 건드렸다.

「무슨 일이요?」

그는 아주 차가운 얼굴로 내뱉었다.

눈빛만으로도 살인할 수 있겠군. 서현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 아, 죄송하지만 댁의 와이프 되시는 분이 공교롭게도 ...」

서현이 잠사 말을 멈추고 어께를 으쓱하자 재인이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고 다현은 오빠의 느닷없는 행동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지켜봤다.

「공교롭게도 나와 얼마 전까지 동거하던 여자거든요. 」

서현의 난데없는 발언에 재인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다현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복도에서 이럴게 아니라 식당으로 내려가지요. 」

이번에는 서현이 다현의 손을 잡아 끌었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오빠의 손을 뿌리치고 노려봤다.

「오빠 내게 이럴 수 있어. 불난집에 부채질하는거야」

「너야말로 이럴 수 있어. 이다다. 입 다물어.  저친구뿐만 아니라 나도 무지 화났다구」

뒤따라온 재인은 다현의 말은 미쳐 듣지 못하고 서현의 말만 귀에 들어왔다.

'다다라구'

그도 다현을 다다로 부르고 있다.

젠장할.

이제 그는 진짜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그녀는 두 남자 사이에서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초등학생 애들도 아니고 무작정 화를 내는 재인과 그를 더 부채질하며 속을 떠보는 서현 오빠나

그들 둘은 전부 다다를 무시하고 있다.

아무튼간에 남자들이란.

「서현 오빠. 재인씨 성질 그만 건드려.」

그녀가 우선 오빠에게 경고했다. 그나마 서현이 이성적이니까.

아이구, 벌써 저 친구 편을 드는구만 .

서현은 속으로 쓴 웃음을 삼켰다.

33

「재인씨, 우리 오빠에요.」

오빠라는 말이 재인의 눈이 의심스러운 듯 빛나자 다현은 한숨을 쉬었다.

「친오빠에요. 닮진 않았지만. 서현 오빠?」

그녀가 서현을 재촉했다.

「김서현입니다. 다다랑 한 이십 년 훨씬 넘게 쭉 같이 산 것도 사실이고」

「오빠!」

다현이 경고하고 나섰다.

「다다 오빠인 것도 사실인데 다다가 호적바꾼 건 오늘 처음 알았군요」

서현이 싱글거리며 재인에게 인사했다

「나도 처음 들었어.」

다현은 재인을 대신해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아...그건.. 앞으로의 얘깁니다. 이재인입니다.」

재인은 이제서야 평상시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 다다 핸드폰의 주인되시나 보지요?. 」

서현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재인을 주시했다.

「내꺼야.  그거.」

그녀가 인상을 썻다.

「넌 그런거 살 리가 없어.」

어림없다는 투로 서현이 딱 잘라 말했다.

「얜 현대문명엔 적응을 못하는 타입이거든요. 핸드폰을 들고 다니길래 누군가 있구나 짐작은 했지요. 」

재인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두 남매를 지켜봤다.

그들은 다다의 말대로 전혀 닮지 않았다. 다현이 또래보다 동안이고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똘망똘망하게 생긴  반면 그의 오빠는 웬만한 모델보다

몇 배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리고 매끈한 얼굴에 대한 은연중에 생기는 거리감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매력과 매너를 소유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재인은 이제 그녀의 가족 앞에 등장하게 되었고 그 사실이 중요했다.

「다다랑 만난지 오래되셨습니까?」

「한 5개월 됩니다. 처음만난 건 한두 달 앞이고 우리 할아버지 소개로 만났습니다. 」

'맙소사. 이 남자가 지금 뭐라고 말하는 거야.'

처음 만났을 때 펄펄 뛴 부분은 깡그리 빼고 마치 집안 소개가 다 끝난 연인사이처럼 재인은 설명하고 있었고 재인의 의도대로 서현은 받아들이는 듯했다.

오빠의 날카로운 눈빛에 다현은 재인은 노려봤다.

「재인씨!」

그녀의 경고성 발언에 언제나 그렇듯 재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 사실이잖아」

「아까 와이프라고 했는데...뭐 내가 요 며칠 집에 안들어 갔어도 그새 하진 않았을 테고 」

서현은 의외로 느긋해 보였다. 난데없는 제인은 등장과 돌발성 발언에 비교적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그럼 결혼 계획이 잡힌 건가요?」

「아니야. 그런거」

재인이 미처 얘기하기 전에 다현이 항의하고 나섰다.

「넌 입 다물어. 김다다. 자격 없으니까. 이재인씨는 오해가 풀렸는지 모르겠지만 난 아직 화 안풀렸어」

「오빠, 그러게 내가 설명하...」

다다가 얼른 꼬리를 내리고 사정하고 나섰지만 그녀의 오빠는 일언지하에 무시했다.

「너한테 들을 얘기 없어. 이다다. 여태 안한 얘기를 이제 와서. 무슨,

투덜거리지 말고 저기 가서 마실 거라도 사와」

「오빠.」

그녀가 항의했지만 그녀의 오빠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다다는 중얼중얼 투덜대면서 서현의 눈초리를 피하고 일어섰다.

「어떻게 하면 한마디로 다다가 저렇게 말을 잘 듣나요 ?.」

재인이 흥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십 년간 패면서 키웠거든요.」

서현이 키들거리며 농담을 하자 그 잘생긴 얼굴로 병원주위가 다 환해졌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흘끗거리고 쳐다볼 정도로.

「아마 내가 그러면 그전에 날 먼저 죽일걸요. 」

재인은 그 방법은 아니라는 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자 의사선생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한 서현의 활짝 웃는 모습은 다다와 흡사했다

「비교적 정확하게 다다를 파악하고 계시네요. 그럼 정말 결혼하실 예정입니까?」

34

「물론입니다. 」

「다다도요? 」

그녀의 오빠는 그녀와 닮은 구석이 또 있었다. 싱글거리는 모습도 그렇지만 예리한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다다는 아직이지만 전 틀림없이 할 겁니다. 」

재인이 약간 도전적으로 영역표시를 하고 나섰지만 그 의사선생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저 진지한 눈빛의 검은 눈만 맑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다다가 음료수를 사들고 왔을 때 그들은 한창 얘기중이었다.

「그럼 2호실 환자가...」

「아십니까?」

「물론이지요. 병원엔 그리 재미있는 일이 별로 많지 않아서...

그런 분이 들어오면 어쨌거나 소문이 돌지요.」

약간 쓴 웃음을 짓고 있는 다현의 오빠는 호기심 어린 표정이었다.

「우리 다다가 고생할 것 같군요.」

「무슨 말이야 ?. 오빠.」 그녀가 둘을 차례로 살펴봤다.

「너 데려가는 남자는 평생고생이라구. 임마.」

「그래서 시집 안가겠다는 거 아니야. 귀한 집 아들내미 속 안 썩일려고」

그녀는 익숙해진 듯 쉽게 받아넘겼지만 재인은 아니었다.

「안돼. 그건.」

「뭐가요? 」

그녀가 재인의 단호한 부정에 눈을 깜빡였다.

「이재인씬 어쨋거나 너랑 결혼하겠다는 거 아니냐. 」

서현이 둘 사이의 의견 대립이 재미있다는 듯 끼어들었다

「할 거라구. 결혼.」

재인이 다시한번 확인하고 나섰지만 다다는 그냥 생글거리고 웃을 뿐이다.

「마음대로 하세요. 다름 사람 결혼까지 이래라 저래라 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재인은 다현을 노려보고는 일어서는 서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언제 시간맞춰 술이라도 한잔 하지요」

「좋지요. 나야 친인척 관계 친목도모는 언제라도 환영이니까」

「친인척은 무슨...」

다현이 코웃음 쳤다.

「그럼 내일은 어때요. 오늘은 다다랑 함께 있기로 해서」

다다의 간섭에 아랑곳없이 재인이 서둘러 날을 잡았다.

「좋습니다. 장소는 이 근처로 하지요.」

「오빠, 바빠서 집에도 못 온다며...」

「집에 갈 시간은 없어도 술 한 잔 할 시간은 있으니까 오빠 사생활에 간섭말고 네 일이나 잘해. 뭐하면 너도 따라 오고.」

「우씨~ 맘대로 해.」

그녀가 투덜거리고는 앞서 나섰다.

「오빠는 왜 내 말은 안듣는 거야 ?. 」

그녀가 심술이 잔뜩나서 그녀의 오빠에게 항의하는 모습은 재미있었다.

똘망똘망한 그녀의 학생을 보는 듯했다.

「너 아직 내가 무지 화나 있다는 거 모르는 모양인데」

그녀의 오빠가 싱글거리면서 지적했다.

「그러게 내 말을 들어보면...」

그녀는 필사적으로 설명하고 싶어했다.

「이다다. 남의 남자 반지 낼름끼고 와서는, 하나밖에 없는 오빠한테 여태 입도 벙긋 안한 사실을 이제 와서 얘기하시겠다고. 」

그녀의 예리한 오빠가 그녀의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여전히 싱글거리면서.

「그런건 반지 끼기 전에 와서 상의하는 거야. 나 아직 엄청 배신감 느끼고 있으니까 조용히 내려가라구」

아무래도 그녀의 오빠와 오랜 시간 진지한 얘기가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한마디로 다다를 침묵시키는지. 그것도 저렇게 싱글거려가며.

아무튼 반지를 끼워준 일은 썩 잘한 일이다. 재인은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떠 올랐다.

그가 끼워준 남의 남자 반지. 다다. 나의 다다.

'반지' 어째서 그걸 잊었을까

재인의 손가락에 끼워있는 18k금반지와 그녀 손가락의 금반지가 한 세트라는 건 누구라도 한눈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날카로운 서현 오빠가 재인과 그녀가 끼고 있는 커플링을 놓쳤을 리가 없는데.

이걸 어쩌나. 엄마라도 알았다가는.

그녀의 얼굴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자 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다현이 그를 흘겨보자 재인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별로. 」

그가 두어 번 기침을 가장해 웃음 삼켰다.

「경고하는데 이다다. 그렇다고 반지 뺄 생각은 말라구.」

「재인씨야말로 딴 맘먹지 말아요. 대체 왜 이래요.」

재인의 경고에 다현이 쏘아 붙였다.

「내가 뭘 ?」

재인은 얼른 딴청을 피웠다.

「몰라 물어요. 우리오빠 햇갈리게 했잖아요. 우리오빠는 진짜로 믿고 있다구요.」

「난 진짜야. 사실이구. 그렇게 할거라구.」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반지낀 왼손을 꽉 움켜 잡자 그녀가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다 재인씨 때문이에요.  어떡하냐구요?」

「책임지면 되잖아.」

재인은 바라던 바였다.

「누가 그러래요. 내기 왜 순순히 반지는 껴 가지고」

「그거야 내가 맘에 드니까 그렇지」

천연덕스러운 재인의 발언에 다현이 코웃음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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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서현 오빠랑 그 난리를 쳤단말야?.」

「응」

다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었겠다. 왜 난 그런 좋은 자리엔 꼭 빠질까?」

현진이 아쉽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야. 유현진 ! 너 내 친구 맞아 ?」

그녀가 현진을 향해 인상을 썻다.

「얜. 내가 네 친구니까 이런 얘길 하지. 아깝다.」

그녀가 진지하게 웃으며 긴 손각락으로 머리카락을 걷어올리자 반듯하고 하얀 이마가 드러났다.

그 우아하고 약간은 섹시한 모습에 - 항상 있던 일이지만 주위 사람들이 그녀를 주시했다.

「오빠가 사람 약올리는데는 또 만만치 않잖아. 」

현진이 키득거렸다.

「응. 얼마나 황당했는데.」

다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진과 다현은 동갑내기였지만 선명한 이목구비와 지극히 여성스럽고 섹시한 불꽃같은 현진과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밝은 미소의 햇빛같은

다현은 아무리 봐도 같은 또래가 아니었다. 하지만 현진과 다현은 서로 다른 이유로 주위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

갑자기 현진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턱을 바치고 물었다.

「뭐가 ?」

「결혼할 거냐구? 」

현진은 항상 이렇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차릴 정도가 되면 예리하고 치밀하게 파고 들어온다.

절대로 한 가지도 놓치는 법이 없다.

「... 몰라 」

다현이 현진의 눈을 피하고 얼굴을 돌렸다.

'하~ 몰라라구. 많이 발전했네. 예전같았으면 절대 아니라고 얘기했을텐데.'

이 순진한 나의 친구가 드디어는 사랑을 하는 모양이다.

「언제간 나 좋다구 죽겠다고 쫓아다닌 애 기억해 ?」

현진이 무심하게 물었다.

「너 좋다고 쫓아다닌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그녀는 화제가 바뀐 것에 좋아서 얼른 대꾸했다.

「왜 있잖아. 아버지가 병원원장이라 쌍거풀 수술하고 다닌 애.」

「그게 아버지가 병원원장이라서 수술한거야?. 니가 쌍거풀 없는 남자는 싫다고 해서 한거지」

「어쨌든 말야. 걔 기억나지?」

「그럼. 몸에 칼댈 정도로 널 좋아했는데.」

「사실 걔 괜찮았거든. 집안도 좋고. 전망도 그리 나쁘지 않고. 인물도 그만하면 빠지지 않고」

「쌍거풀이 없는거 빼고.」

다현이 마무리 지었다.

「근데 개가 왜 그렇게 싫었는 줄 알아?.」

「넌 원래 모든 이유를 만들어서 남자들을 싫어했어. 」

다현의 빈정거림을 무시하고 현진이 계속 얘기했다.

「맨난 걔 자가용으로만 다니다가 어느날 전철을 타고 가는데 글쎄 의자에 다리를 떡 벌리고 앉더라구.」

「근데 ? 」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보기 싫니? 너무 보기 싫은거 있지」

「별난게 다 싫다. 남자들이 여자처럼 다리 오므리고 앉아봐. 그게 더 웃기지」

다현이 기가막히다는 듯 눈을 떼구르르 굴렸다.

「그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

그녀가 웃었다.

「근데 사람은 말야. 99가지 장점 중에서 한 가지 단점만 보면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래도 온갖 정나미 다  떨어지는 거구,

99가지 단점밖에 없는 사람인데 나머지 1%의 장점이 눈에 띄면, 거기에 반하는 거야.

그게 그 사람의 매력인거지.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내게 그런 1%의 어떤 것이 눈에 띈다면 사랑하게 되는 거야.」

현진이 다현을 향해 똑바로 주시했다.

「재인씨 1%의 어떤 것도 없는 남자니?」

「아니. 내겐 너무 매력이 많아 탈이야.」

다현이 현진의 눈을 피하여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이 마치 불만이라는 듯이.

「그럼 결혼해. 」

다현은 자신을 향해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는 현진을 바라보았다.

너무 예쁜 친구.

어려서 맘고생 심하게 했지만 그렇게 이렇게 근사하고 씩씩하고 아름다운 내 친구.

한때 다현은 현진과 서현이 조금 심각하고 복잡한 관계로 발전하길 빌었지만 그 둘은 언제나 남매였다.

현진은 어렵게 만난, 그녀가 가질 수 없었던 또 하나의 가족을 절대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남매였고 자매였다.

36

재인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던 현진은 자신의 쭉 뻗은 긴 다리를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는 짙은 눈동자의 그 남자에게 섹시하게 웃어 보였다.

「제 다리가 맘에 드시나요?  」

그 남자는 현진은 의외의 질문에 당황해하지도 않고 애송이처럼 얼굴이 붉어지지도 않았다

그저 약간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맘에 든다는 듯이

「그런데 어쩌지요 ?. 오늘 제 파트너가 저쪽에 도착했네요. 」

그녀는 한잔 가볍게 할 수 있는 칵테일바와 식사를 할 수 있는 테이블을 가로지른 관엽수 틈에서 창가쪽에 도착한 재인을 발견하고는 목이 긴의자에서 우아하게 일어섰다.

현진의 붉은 드레스가 무릎주위에서 찰랑거리며 그녀가 일어서느라 고개를 약간 숙이자 깊이 파인 드레스의 가슴선이 언듯 엿보였고 사내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물론 현진도 그 사내의 강렬한 눈초리를 느꼈지만 그녀는 다시한번 아름답게 웃어 보였다.

속으로는 이를 갈면서.

현진은 재인을 향해 가면서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삼켰다.

빼빼 말랐던 그녀가 키가 크고 가슴이 풍만해지면서 저런 사내들의 반응에 익숙해 있는 현진이었지만 오늘 저 남자의 위험한 시선은 어쩐지 감당해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현진은 자신의 감정을 삭혀냈다.

격렬하게 반응하면 더 재미있어 할뿐이고 수컷으로서의 본능만 자극할 뿐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현진은 그걸 알고 있었고 그녀는 얼마든지 그런 사내들을 감당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름다움과 섹시함을 그녀는 현명하게 이용할 줄도 알았다.

「유현진이에요. 재인씨 맞지요?.」

그녀가 재인에게 인사하자 재인이 예의바르게 의자를 꺼내주었다.

언제가 다현이 보여 준 사진속의 남자는 실물이 훨씬 더 근사했다.

'으음. 이 남자는 완전히 다현이한테 맛이 갔구만.'

그녀의 등장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재인의 모습에 현진은 한눈에 재인을 파악했다. 현진이 보란듯이 섹시하게 다리를 포갰지만 재인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대분분의 남자들은 아까 바 근처에서 본 남자와 같은 반응을 한다.

'어떻게 이 여자를 꼬실 수 없을까. 저런 여자랑 하루밤 뒹굴면 굉장할거야. '

현진은 얼핏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재미없군. 이런 남자를 상대로 테스트 해봤자 도루묵이야. 이 추운날 괜히 이렇게 차려입고 나왔군.

현진은 다현의 사랑을 보면서 행복했다. 내 어린 동생에게도 이제 행운이 왔다.

「저 혼자 와서 실망하지 않으셨어요?」

「아. 아닙니다. 조금 전에 전화 왔었어요. 좀 늦겠다고.」

「아마 길을 못찾고 있을 거에요.」

현진이 고운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웃었다.

다현의 친구는 그녀가 말한대로 아름다웠다. 그의 다현만큼  매력은 없었지만 시선을 끄는 얼굴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객관적인 평가를 내렸다.

「정 못찾으면 전화하라고 했는데...자존심 상해서 아마 안할 거에요.」

재인이 웃으며 말했다.

「음... 요사이 밤에 잠을 잘 못자서 아무래도 제 매력이 덜한 모양이지요?.」

그녀가 고운 이마를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네?」

열심히 창밖을 지켜보던 재인이 그제야 현진을 보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무리 다현이가 예뻐도 그렇지, 앞의 손님은 안보고 시계랑 창밖만 보시잖아요.」

「아. 죄송합니다.」

재인이 급하게 사과를 했다.

「다다가 아무래도 길을 못찾는 것 같아서.」

「그래도 걘 찾아와요. 익숙하거든요. 길 헤매는 거에.」

그녀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살짝 웃자 주위사람들이 모두 그녀에게 집중했다.

다현에게 온통 정신이 나간, 앞에 앉아 있는 이재인이란 남자만 빼고.

이 남자가 이렇게 열심히 다현을 기다리는 이유가 단지 그 유산 어쩌구 하는 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에 현진은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다.

한 10분 정도 지나서 다현이 급하게 들어서자 그제야 재인의 얼굴에도 여유와 웃음이 드는 걸 보고 현진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인턴은 사람이 아니에요. 물론 의사도 아니구요. 가봐야해요.」

점심식사를 마친 현진은 부랴사랴 병원으로 들어가봐야 한다고 했다.

「아마 지금도 날 잡아먹으려고 할거에요.」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어디 가는 거에요 ?. 」

병원에 현진을 내려놓은 재인이 차를 꼬불꼬불 골목길로 몰아대자 다현이 궁금해했다.

「어. 오늘 모임있어서」

「근데 나도 가도 돼요.」

「응. 친구들끼리 얼굴 보는 거야.」

「나가면 조금 그럴텐데... 」

그녀가 불편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옷도 그냥 입고 왔단 말이에요,」

「지금도 이뻐.」

재인은 흘긋 다현을 훑어보고는 미소지었다.

「난 부담스러운데....」

「그럴 것 없어. 윤후 녀석도 있을테고. 재선이도 올 거야. 걱정 마.」

재인은 다현을 다독거렸다.

37

여의도 구석진 곳에 이런 곳이 있었다. 무슨 창고같이 생긴 건물 안은 의외로 해가 환하게 쏟아지고 있었고
파스텔 빛깔의 창호지로 둘러싸인 커다란 해가리개가 십이월 오후의 햇살을 막아내고 있었다.

한쪽벽을 차지한 고급스러운 스틸로 치장된 바외에는 체리빛 목재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특별한 장식이나 걸개가 전혀 없는 그곳은 여유로운 고급스러움을 연출하고 있었다.

재인을 발견한 긴머리를 곱게 묶은 어떤 남자가 반갑게 맞았다.

「야. 김재인. 이제 좀 한가한가보지? 여길 다 왕림하시고」

「임마.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동안 좀 뜸했다. 」

긴머리 남자가 다현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서오세요.」

「형수님이시다. 여기는 강은환. 물장사하는 그림쟁이.」

재인은 다현에게 은환을 소개하자 긴머리의 그림쟁이는 한손을 두르고 있는 앞치마에 슥슥 문지르고는 손을 내밀었다.

「환영합니다. 어쩌다가 이런 녀석 꾐이 빠지셨습니까.」

은환이 안쓰럽다는 듯 한 표정을 짓자 다현이 웃음을 터드렸다.

「그러게 말이에요. 」

「저녀석 말 듣지 마 」

재인이 인상을 썻지만 그의 입가와 눈에는 웃음이 걸려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

「응. 안에 있어. 오늘은 너까지 왔으니까 다 왔다. 들어가라.」

은환은 앞치마를 젊은 직원에게 벗어주고 또다른 입구쪽으로 향했다.

작은 복도로 연결된 홀은 입구쪽보다 훨씬 넓고 호화로웠다. 편안하고 안락해 보이는 작은 쇼파와 티테이블로 이루어져 있었고 따뜻한 조명이 빛나고 있었다.

주희는 가장 먼저 재인의 등장을 알아챘다. 윤서의 말대로 재인이 오랜만에 공간에 나타난 것이다.

주희의 환한 표정에 윤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기저기서 재인을 향한 인사와 환영이 오갔고 다현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공간에서의 재인은 그녀가 모르는 다른 사람이었다.

재인의 등장에 들떠 있던 주희는 다현을 미처 보지 못했지만 윤서는 아니었다.

재인 뒤에 머뭇거리고 있는 - 그러면서도 재인의 손에 붙들려 눈을 똑바로 직시하는 그녀를 윤서는 알아챘다. 재인오빠는 혼자가 아니야.

그녀는 다시 주희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재인오빠.」

주희가 재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어, 주희구나. 」

재인은 때 아니게 기분좋은 미소를 되돌렸고 주희는 가벼운 흥분으로 눈을 반짝거렸다. 주희가 채 뭐라고 하기도 전에 윤서가 끼어들었다.

「좋아 보이네. 오빠. 소개 안시켜줘 ?. 」

「아. 다현아. 윤서, 윤후 동생이야. 내 동생같기도 하고」

재인의 등뒤에 가려있던 그 평범한 여성은 겨우 앞으로 나와 인사를 했다.

그녀는 약간 얼굴이 굳어져 있었지만 웃어보였다. 주희는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재인이 여자를 동반하고 공간에 나타나기는 처음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얼굴도 처음 보는 데. '

「전 한주희에요.」

재인이 소개를 하기도 전에 주희는 선뜻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그저 다시 웃어 보였다.

'뭐야. 이 여자 말 못해?.'

주희는 얼굴을 살짝 찌푸린채 재인과 다현을 바라봤다.

재인은 아주 흐뭇하고 밝은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싱글거리고 있었다.

주희는 재인이 그녀에 대해 설명해주길 원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재인은 그의 사생활에 대해 거론하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스스로가 화제 오르는 것을 무지 싫어했으며 그 누구에도 자신이 허락하지 울타리에 접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38

'도대체 저 여자가 누구냐구.'

주희는 완벽하게 칠해진 립스틱바른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윤서는 그런 주희를 보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재인이 공식석상이 아니 개인적인 자리에 여자를 동반했다. 매주 바뀌는 화려한 여성편력이 아닌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어떤 여자를 누가 보아도

확실한 진지함으로 동반하고 있다.

그게 무슨 의미란 걸 윤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주희도 마찬가지일텐데.

윤후와 재인은 서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자금흐름에 따른 재계의 변화를 농담처럼 얘기하고 있었지만 지금도 재인은 그녀의 어깨에 둘렀던 팔을 허리에 걸치고 있었다.

무의식적이고 자연스러운 그의 손놀림은 다현에 대한 철저하고도 완벽한 소유를 주장하고 있었다.

「뭐 드릴까요?」

은환이 한쪽 벽에 준비된 티테이블을 가리키며 물었다.

「난 얼음물이나 줘. 차 가져왔어.」

「임마. 너말고 다현씨한테 물었어.」

은환이 얼굴을 장난스럽게 구기고 재인을 흘겨봤다.

「다현인 술 못해. 니가 해준 칵테일 한 잔 마셨다간 내내 잘 거라구.」

재인이 은환의 속셈을 다안다는 듯 코웃음쳤다. 은환의 칵테일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그 정도와 향취가 굉장히 강렬하고 독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다현씨 잠들면 너한테 기회지.」

윤후가 얼른 참견했다.

「그런가 ?」

재인이 킥킥거리고는 다현을 향해 능청스럽게 물었다.

「마실래 ?」

다현을 그런 재인을 노려본 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아주 가볍게 만들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은요. 」

다현은 은환이 만들어낸 푸른색 칵테일의 색과 빛의 조화에 이끌여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였다.

'꼭 작은 강아지 같군.'

주희는 심술궂게 평가를 끝냈다.

'촌스런 저 여자는 자기가 무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구.'

「포기해.」

윤서가 낮게 충고했다.

「네 눈엔 저 둘이 지금 어울려?」

「몰라. 그게 중요한게 아니야. 네 눈엔 재인오빠 얼굴이 안보여 ?. 네가 목표로 하고 있는 저 남잔 이미 과녂 밖야. 다른 여자한테 정신나가 있다구.

그걸 무슨 수로... 주희 내 눈에도 보일텐데.」

진실을 얘기하고 있는 인정머리 없는 친구를 쏘아보며 주희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재인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본 다현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그녀가 본 재인은 그동안 보아온 재인과는 다른 사람이었고 그런 재인을 보는게 즐거웠다.

재인의 사촌이라는 - 처음 학교에서 인사를 재선은 조금 늦게 공간에 나타났다.

그때처럼 예의바르게 웃는 재선에게 다현도 고개를 끄덖여서 작은 인사를 전했다.

「형좀 빌려갈께요.」

재선은 다현에게 양해를 구하고 공간 깊숙이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방으로 재인을 이끌었다.

재인은 난데없는 재선의 부름에 약간 고개를 찌푸렸지만 다현을 윤서에게 맡기고 순순히 재선을 따라나섰다.

「그럼 너랑 태하를 같이 불렀단 말야」

재인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알기로 할아버지가 재선과 태하를 연관시킬 일을 하나도 없었다.

「응. 거기다 사본 갖고 들어오라구 하시더라구.」

재선의 말에 놀란 윤후가 재인을 바라봤다.

「유언장 내용을 고치시려나.」

「난 상관없어. 뭐가 어찌되던 난 바라는게 없다구.」

놀란 표정의 윤후와 걱정스러운 재선을 둘러보고 재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그게 아니라구, 형. 정말 다현씨한테 관심없는 거야? 할아버지가 만나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만나는 거냐구?」

그의 형이 다현에게 보내는 그 따뜻한 시선을 알아차린 재선이 말했다.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재인이 딱부러지게 선을 그었다.

「형 잊었어. 그 서류에는 형 이름 뿐만 아니라 태하 형도 들어가 있다구.」

답답해하는 재선의 말에 재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도 말아. 할아버진 나랑 약속하셨다구. 시간을 주기로...」

하지만 그 음흉하기로 소문난 그 양반의 속셈을 누가 알겠는가

재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다는 내꺼야. 이제 와서 내게서 다다를 뺏을 수는 없어.

그는 맘속에 일어나는 맹렬한 소유의식을 다잡으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 없어. 그러니까 호들갑 떨지 말고 다녀오라구. 그 양반 꿍꿍이가 뭔지 한번 알아보자구.」

「아니야, 아직 알아야 할 게 한 가지 더 있어」

「또 뭐?」

재인은 고집센 할아버지의 유언장보다는 낯선 곳에서 혼자 있을 다현이 훨씬 더 걱정되었다.

「오늘 할아버지가 사본 갖고 오라셔서 한 번 쭉 훑어보니까 첨엔 몰랐는데 내용에 틈이 있더라구.」

무슨 뜻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재인이 주시했다.

「할아버지가 의도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다현씨가 형이든, 아님..태하...둘 중에 누구랑 결혼하든 재산처분권은 그 남편한테 있어. 」

「그건 다 알고 있었잖아. 」

「근데 이혼 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안하셨어. 결국 혹시라도 이혼하게 될 경우에도 배당금말고는 모두 남편에게 권리가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 」

재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니까 결혼만 일단 한 후에 이혼을 하든 같이 살든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은 남편이라고. 그게 형이든 아님 태하형이든.」

「상관없어. 난 결혼하면 이혼안해. 그러니까 태하 그 자식 얘긴 하지도 마.」

「그럼 형은 다현씨랑 결혼한다는 얘기야 ?.」

결혼이라면 길길이 날뛰던 재인의 입에서 한마디의 거부나 부정도 없이 그가 지금 결혼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런 중대하고 심각한 변화를 형은 스스로 알아채고 있는 걸까 ? 재선과 윤후는 저도 모르게 눈을 마주쳤다.

「당연하지. 그녀는 내거야.」

재인은 당당하게 선언했다.

「혹시래도 태하한테 그런 얘기 흘러들어가지 않게 하라구. 그 녀석 그 얘기 들으면 물불 안가리고 덤벼들테니까. 」

39

주희는 재인과 재선이 함께 사라지자 재인의 시선을 어떻게 든지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에 재인과 재선, 윤후들이 사라진 밀실로 향했다.

그리고 얼결에 주어들은 내용이 무슨 뜻인지 금방 파악했다.

'아하. 사연이 그렇게 된 거였군. 그럼 그렇지.'

물론 재인의 그 마직막 단호한 선언이 맘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런 것쯤은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주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녀에게는 무기가 주어졌고 그걸 어떻게 사용해야 할 줄 아는 여자였다.

재인이 재선과의 이야기가 끝나고 다시 홀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희가 재인의 팔에 매달렸다.

「재인오빠. 할 얘기 있어요. 」

「응? 지금은 좀 곤란한데 .... 」

약간 굳어진 얼굴로 재인은 주희의 팔을 떨어냈다.

「하지만 오빠. 이번 전시회 오빠네 호텔에서 할거란 말야」

주희는 여전히 재인을 붙들고 놓지 않았다.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행동이었다.

둘의 사이가 그렇게 서류상으로 이어진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재인이 그녀에게 가지고 있는 관심과 감히 저여자가 재인오빠에게 품을 수 있는

호감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혹시라도 갖고 있을지 모르는 믿음을 뒤흔드는 일이 가장 우선이었다.

'아마 저 여자도 이 광경을 보겠지. 흥 한번 속을 태워봐. 그리고 고민하라구 '

그녀는 더욱 재인의 품안으로 들었갔다.

「그건 영업부쪽이랑 얘기하라구. 내가 전화해놓을테니까. 」

재인은 눈으로 다현을 찾아내면서 다시 주희의 팔을 빼냈다.

「치~. 난 오빠를 보고 그쪽 호텔로 유치시킨거야. 근데....」

「고맙지만 네 도움 없이도 우리 호텔은 잘 굴러가고 있어. 」

재인은 이제는 좀 차갑게 얘기하고 다현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현은 웬 여자가 재인의 팔에 매달려 웃음을 날리자 속으로 약이 올랐다.

여자의 본능으로 그녀는 아까 주희가 인사해왔을 때 그녀가 가진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재인을 원한다.

'아마 재인이 서현 오빠와 나를 발견했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은환의 푸른 보석이 뇌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는지 그녀는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사실 저 여자 품에서 재인을 끌어내기 위해서라면 머리 아니라 더한 거라도

아플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가 아프다고 중얼거리는 다현을 차에 태운 재인은 다현의 얼굴을 흘끗 바라봤다.

「술을 주지 않을 걸 그랬다. 근데 왜 심통이야 ?」

「심통 안났어요」영락없이 심통난 표정으로 다현이 중얼거렸다.

「심통난 것 같은데.」

흘끗 다현을 바라본 재인이 말했다.

「그 여자도 당신 동생이에요 ? 아님 누나거나... 」

난데없이 다현이 물어왔다.

「무슨 말이야 ? 그 여자라니.」

「당신 팔에 매달려서 좋아 어쩔 줄 모르던 여자 말이에요.」

재인은 얼핏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이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이 방법을 쓸걸.'

다현이 이제야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항상 혼자만 흥분하고 혼자서만 열을 냈었는데 이제 다현도 그에게 맘을
보이고 있다.

「웃지 마요. 내가 다른 남자 만난다고 했을 때 펄펄 뛰고 화냈잖아요.」

「근데 ?」

「생각해보니까 당신 맘을 알 것 같아요.」

그녀는 그 사실이 못내 맘에 들지 않는 듯 여전히 시무룩한 어조였다.

「그것봐. 나니까 그 정도로 참은 거라구.」

재인이 이제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럼 그 여자랑 결혼할 생각이에요 ? 」

다현은 왜 자신이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몰랐다. 아마도 그 둘이 너무 잘 어울려서 그랬던걸까.

「그게 무슨 소리야 ? 걘 그냥 동생이야. 난 다다랑 결혼한대니까」

「난 결혼은 안한다니까요.」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다는 사실 본인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녀는 약간 취해있는 듯
하다. 조금은 혀도 풀리고 얼굴은 알콜로 인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흠. 그 점에 대해선 우리 둘이 얘기가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무슨...」

「그럼 오늘 얘길 마무리 짓자구.」

「근데 ...아무리 이해할려고 해도 화가나요. 나 화났다구요. 그리고 머리도 아파요 」

'이 여잔 술이 취해도 귀엽군. '

「알아. 그러니까 잠시 쉬었다가 가자구 」

웃음을 참으면서 재인이 말했다. 그는 다현이 화가 나건 말건간에 아주 기분이 좋았다.

「어디 가서 얘기 좀 하고 좀 쉬었다 가자.」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다현의 살짝 내밀 입술에 입맞추고 싶었다.

그날처럼 완벽하게 내 품안에 가둔 채로. 운전만 하고 있지 않다면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을텐데.

그럼 그때처럼 그녀의 온기와 향기를 맘껏 들이마실 수 있을텐데

그 상상만으로 그의 몸 한 부분은 묵직하게 흥분했다.

40

재인은 차안에서 꼼짝 안하고 내리기를 거부하고 있는 다현의 손목을 잡고 차에서 내렸지만 아까 주희와 어울리던 재인의 모습이 영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약이 올라 있는 그녀는 그의 아파트로 올라가길 거부했다.

「딴 여자들도 이렇게 당신 집에 와서 쉬어요?」

「절대, 절대 아니야. 당신이 처음이라구.」

재인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다현을 달랬다.

「후~ 자꾸 이러면 어깨에 들쳐매고 갈거야.」

재인의 눈빛은 진지했고 다현도 그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 횡포야. 알아요? 가기 싫다는 거 억지로 끌고 가는 거잖아요. 」

그녀가 여전히 심술을 내며 투덜댔다.

「좋아. 마음대로 얘기하세요. 아가씨. 난 그보다 더한 짓이라도 할 놈이니까」

재인은 입가에 미소를 지고 그녀를 부축해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거실의 버티칼을 걷어내자 서울의 야경이 아름답게 펼쳐졌지만 머리가 아프고 심기가 마땅치 않은 다현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다.

「커피라도 마실래? 약줄까 ?」 재인은 커피메이커를 작동시키며 물었다.

「집에 갈래요」

「애들처럼 떼쓰지 마. 우리 사이에 얘기는 끝내야지.」

재인이 여전히 웃음을 참으며 그녀를 막아섰다.

「난 다 끝났어요.」

다현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난 아직 아니야. 그리고 다다도. 당신도 그거 알텐데. 결혼 정말 하기 싫어 ?. 우린 결혼하기로 했잖아」

「아니요. 그건 당신 생각이에요. 잊었어요 ?.」

그녀는 여전히 부루퉁하게 말했다.

「애초부터 처음부터 당신 나 좋아하지 않았어요. 내가 할아버지한테 꼬리쳤다고 그랬지요. 그럼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재인씨한테 꼬리쳤다구.」

한숨 쉬듯 다현이 중얼거렸다.

「그건 옛날 얘기잖아.」

재인은 잠시 스쳐간 몇 개월전의 상황을 생각하고 웃음지었다.

「나랑 결혼하고 싶으면 당신 여자친구한테 확실히 했어야지요. 」

「주희는 내 여자친구가 아니야.」

그가 터져나오는 웃음을 꾹꾹 참으며 이야기했지만 그의 입가에 걸린 웃음에 그녀는 더 약올라했다.

「나랑은 관계없어요. 」

술이 취해도 그녀는 고집불통이었고 재인보다 어느 면에서는 한수 위였다.

「관계가 왜  없어? 난 다다랑 결혼할 거야. 당신도 결혼할 남자한테 관심 좀 갖는게 어때」

그는 은근하게 다현을 압박했다.

「누가?  어림없어요. 」

그녀가 갑자기 발딱 일어서자 재인이 그녀를 홱 돌려 안았다.

「농담 아니야. 어림없는 일 아니라구.」

「혼자 하라구요. 정 하고 싶으면.」

「이런, 내가 딴 여자랑 결혼해도 괜찮다 그거야.」

절대 괜찮지 않았다.

특히 그 한주희라는 여자와 결혼하다면 우리반 애들이라도 데리고가 풀어 놓고 말테다.

하지만 속마음과는 달리 그녀는 약이올라 빽 소리를 질렀다.

「맘대로 해요. 나 상관말고 나 좋다는 남자도 많다구요.」

「그런 놈들 다 정리하라고 그랬잖아.」

재인이 맞받아 소릴 질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재인은 다현의 모든 심통을 이해할 수 있었고 오히려 그녀의 민감한 반응을 즐겼지만 그녀의 입에서 딴 남자 얘기가 나오자 재인은

그동안의 즐거웠던 기분과 자제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싫어요. 왜 나만 그래요 ?.」

「오늘 지나면 그런 소리 못할거야.」

그의 눈빛이 어둡게 짙어졌고 표정이 사나워지자 다현이 겁을 먹고 한두 발짝 물러섰지만 의외로 재인은 그녀를 막지 않았다.

「그러게 겁먹기 전에 생각했어야지. 성질 좀 죽이라고」

「누가 겁먹어요 ?.」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재인을 바라보자 재인이 피식거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다한테 이래서 반한 것 같아. 딴 사람들은 이 상황에서 그렇게 전투적이지 못하거든.」

「딴 여자랑 나랑 비교 말아요. 」

「그런 딴 자식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구.」

재인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어 무조건 안았다.

「그러지 마. 심술내도 좋은데 딴 놈 있단 얘기는 하지 말라구.」

재인의 낮은 한숨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날렸다.

「조금만 참아요. 우리 한 4개월만 있으면 돼요. 그러면 당신도 이 고생 안해도 된다구요」

「정말 그렇게 하고 싶어 그게 진심이냐구... 맘에도 없는 말 하지마」

「당신 만나기 전엔 이렇게 힘들지 않았다구요. 난 편안하게 살고 싶어요. 난 내 남자가 너무 잘나서 그 사람 그늘에서 살기도 싫구 엄청 많은 재산 때문에

머리 아프기도 싫어. 이 여자 저 여자 꼬리치는 건 더 싫어.」

그녀가 투정하듯이 칭얼거렸다.

「걱정 말라구. 난 당신보다 그다지 잘난 놈도 못되고 다현이도 엄청 부자라구. 그리고 여자들은 다다가 나랑 결혼만 하면 난 그날로 유부남이야.

아무도 어쩌지 못한다구. 그러니까 그꼴 보기 싫으면 우리 결혼하자」

그가 웃는게 머리위로 느껴졌고 재인은 두 팔로 다현을 더 꼭 끌어안아 자심의 품안에 가두었다.

「정말 그래버릴까보다....」

다현은 심술궂게 한숨을 쉬며 그의 품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재인은 여전히 팔을 풀지 않고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놔요. 답답해요. 」

「이 상황에서 잘도 그런 소릴 하는군.」

재인은 다현의 달콤한 입술에 진하게 키스하면서 투덜대는 그녀의 말을 그의 입술로 막았다.

'알콜이 들어가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걸거야.'

재인과의 짙은 입맞춤에 정신을 놓으며 다현이 속으로 생각했다.

41

재인이 크리스마스때 디올의 돌체비타와 함께 선물해서 다현을 놀라게 한 단순한 체인에 다이아몬드가 매달린 목걸이 -

그녀는 당연히 그 반짝이는 보석이 인조인줄 알고 있지만 - 를 손으로 만지작 거리며 다현이 재인의 제안에 마시던 커피를 내려놨다.

「나도 꼭 가야하는 거에요? 」

「왜? 가기 싫어?」

재인이 커피잔을 내려놓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다현을 바라봤다.

「별루 내키지 않아요. 난 파티 뭐 그런건 외국에서나 그런거 하는 줄 알았어요.」

다현이 비쭉거렸다. 재인은 회사창립 파티때 그녀를 파트너로 데려가려 하고 있지만 다현은 영 내키지가 않았다.

'무슨 파티야. 국가경제도 어려울 때에. 외국도 아닌데, 그냥 그런 날은 회사사람 하루 놀게 하는게 최고지. '

다현이 투덜거리자 안그래도 그날은 성현그룹 직원들은 쉰다고 한다. 다만 임직원들끼리 외부인사 모시고 저녁때 밥먹는 거라며 설득했지만 다현의 표정은

아무래도 가고 싶은 얼굴이 아니다.

「안돼. 그래도 가야해. 할아버지가 데려오라고 엄명을 내리셨단말야. 」

「할아버지가요?」

다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신네...그... 고약한 대장이요?」

다현이 재인이 항상 할아버지를 가리키며 쓰던 용어를 사용하자 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응. 그 고약한 대장이. 궁금하지 않아?. 누가 다다를 찍었는지.」

「음...궁금해.」

다현은 호기심을 드러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래도 난 파티같은거 한 번도 안가봤어요. 」

「그럼 이번 기회에 한 번 가보면 되겠네. 앞으로 나랑 살면 종종 참석해야 돼. 자주는 아니더라도.」

「누구랑 살아요?」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나랑.」

재인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다현을 일으켜 세웠다.

「나가자. 얼른 나가서 대충 준비해도 집에 가면 늦겠다.」

「뭘 준비하는데요?」

그녀는 얼떨결에 일어서며 물었다.

「파티 한 번도 안가봤다면서. 그러니까 옷도 없을거 아니야. 옷이랑 그... 여자들 물건 사려면 시간이 좀 걸려. 빨리 가자.」

「옷이요?」

「응. 어서 가자구요, 아가씨, 늦으면 난 당신 오빠한테 변명거리 만들어야 한단 말야. 메스 들고 달려올텐데.」

재인과 함께 도착한 파티장은 꽤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당신 대장, 아니 할아버지 어디 계셔요?」

다현이 파티장의 규모와 호화로움에 놀랐는지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재인도 삼 년 전 할아버지랑 대판 싸우고 난 후에 처음 참석하는 파티여서 여기저기서 인사 받느라 바빴다.

「어...」

그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도착 안하신 모양인데.」

재인의 참석은 다른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대판 싸우고 나갔다는 그 후계자가 마치 돌아온 탕아처럼 느긋하게 파티를 주도하고 있는 모습은 그동안의 성현그룹내의 모든 세력다툼을

종식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고 더욱이 재인 곁에 있는 흰색 드레스를 입고 얌점히 머리를 올리고 있는 다현에게 엄청난 호기심의 눈초리가 쏟아졌다.

다현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지자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저기요?」

「응?」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

다현이 재인에게 물었다.

다현은 이옷 저옷 엄청 입혀대는 재인에게 화를 내고는 결국 흰색 원피스 드레스를 움켜쥐고는 그 옷으로 결정 내렸다며 재인에게 눈을 흘겼다.

솔직히 재인은 다현이 입었던 다른 모든 옷들이 맘에 들었고 입을 때마다 다른 모습의 다현이 예뻐서 계속해서 옷을 입혀댄 것이지만 오늘 다현의 모습을 보니까

그날 그녀가 올바른 선택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흰색 원피스는 무릎보다 약간 길게 내려와 예쁜 종아리가 살짝 내려다보이고 있었고 몇 가닥 내려온 머리를 빼고는 위로 감아 올린 머리카락 덕분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귓가와 흰 목덜미가 탐스럽게 내보이고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안묻었는데. 너무 예뻐. 」

재인의 마지막 말에 다현의 얼굴이 빨개졌다.

「나도 알아요. 하지만 그렇게 크게 얘기하진 말아요.」

그녀가 입가 미소를 띄며 새침하게 말하자 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주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재인과 다현의 다정한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미소짓게 했고  재인이 선택한 여자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이재인은 어쩌면 성현그룹의 차기 회장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는 적으로 돌리기에는 걸끄러운 사람이었다.

주희는 일단 시간을 기다렸다. 그녀는 일생일대 최고의 사냥감을 노리고 있었고 그건 기다릴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42

「이 여자분이 네 파트너니? 」

고모의 물음에 재인은 다현의 허리에 힘을 주어 끌어 안았다.

오십대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싱싱한 피부와 매끄러운 몸매를 과시하고 있는 재인의 고모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다현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제가 결혼할 여자에요. 다현아 . 이쪽은 우리 고모, 수영미술관 관장이시지. 」

다현은 재인의 결혼소리에 약간 찔금했지만 아무소리 않고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그리고 재인과 그 고모라는 사람과의 긴장된 분위기를 읽고 조금 당황했다.

고모랑 조카 사이가 왜 이렇게 싸늘할까.

「결혼하겠다고?」

수영은 코웃음을 쳤다.

「뜻밖이로구나. 」

수영은 다시 한 번 다현을 살펴봤다. 못보던 얼굴이다.

「못듣던 이름이구나. 내가 아는 집 규수는 아닌 모양인데...」

「제겐 소중한 여자에요. 그리고 고모가 제 아내감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지요.」

재인은 고모의 싸늘하 물음에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흥. 결국 아무 힘도 권력도 돈도 없는 집안이라는 얘기군. 」

누가 지 애비 아들 아니랄까봐. 하는 짓이 똑같군. 작은 오빠도 똑 같았다.

어디에서 굴러다니던 출신을 알 수 없는 여자랑 집안에서 그 반대하는 결혼을 강행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수영은 분해서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다현이라는 이여자에 대한 적의가 치밀어 올랐다.

「이것봐요. 이 집안이 어느집안이라고 여자가 아무자리나 선뜻선뜻 따라나서? 주제를 알고 처신하도록 해. 여기는 자네랑은 어울리지 않아.」

갑작스러운 수영은 공격에 재인은 눈에서 불을 뿜었고 다현은 하얗게 질렸다.

「그만하세요. 지나치시군요. 가자 다현아. 」

창백한 모습의 다현을 한쪽 팔안에 깊숙이 끌어 안으며 재인은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다

「제 결혼에 대해서 고모 허락은 필요치 않다는 거 모르시나요?. 계속 이러실거면 앞으로 이런 자리엔 나오지 마세요. 」

그건 틀림없는 경고였다.

「네가 이래라 저래라 할 사항이 아니야. 」

수영은 독이 올라 조카에게 쏘아 붙였지만 재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고모야말로 제 일에 간섭하지 마세요. 그리고 제겐 그만한 힘이 있어요. 고모도 잘 아실텐데요. 벌써 잊으셨어요? 이 집안의 장손이 누군지? 」

아주 낮고 냉랭한 목소리로 재인이 윽박질렀다.

「그리고 고모나 고모부 처신이나 잘하시지요. 앞으로 더는 봐드지 않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쯤에서 그만하세요.

만에 하나라도 제 결혼이나 이 여자한테 허튼 소리가 조금이라도 들릴 시엔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조심하세요. 」

수영은 약이 올랐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느새 그의 조카는 그녀가 어쩔 수 없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괜찮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재인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원래 저런 분이야. 신경쓰지 마.」

다현이 아무 말없이 물끄러미 재인을 바라봤다.

재인은 파티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다현을 감싸안고 다른 걱정 하지말고 나만 믿으라고 달래주고 싶었지만

아직 할아버지나 다른 식구들이 도착하지 않았다. 오늘 다현을 소개하고 싶었는데 원치 않는 불청객이 먼저 다현을 본 꼴이다.

「지금 나갈까?」

「아니요. 이런데 오기 쉽지 않은데 조금 있다 가지요. 지금가면 도망가는 것처럼 보여서 싫어요,」

다현이 씩씩하게 웃자 재인도 겨우 미소지었다.

파티가 무르익어가자 재인은 오랜만에 참석한 파티에서 이사람 저사람에게 접대를 하고 인사를 받느라 바빴다.

그가 아무리 오만한 이재인이라 할지라도 그도 사업하는 사람이었고 개중에는 할아버지의 지기되는 사람도 많은지라 무작정 뻣뻣이 서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재인은 조금 떨어져 있는 다현을 흘끗 바라봤다. 다행히 옆에 윤서와 재선, 그리고 주희가 함께 하고 있었다.

너무 덥고 사람들에 치인 다현은 아무데도 가지 말라고 경고를 한 재인과 눈을 마주치느라 한참을 바라봐야 했다.

다현은 재인을 향해 나무뒤에 숨어 있는 테라스를 가리켰고 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현은 파티장을 빠져나오자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좀 살겠네.」

「다현씨. 」

겨우 숨을 돌리고 있는 다현을 따라 누군가 다가섰다. 다현은 한숨을 쉬었다.

「얘기좀 하지요. 우리. 」

언젠가 '공간'에서 인사한 한주희라는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녀의 눈빛은 그때보다 더 사납게 번득였다.

이 여자는 나한테 뭘 원하는 걸까. 뭘 바라길래 저런 눈빛으로 날 주시하는 걸까

홀 안의 답답한 공기에 썩 기분이 좋지 않던 다현은 이 여자의 진한 향기에 갑자기 머리가 아파졌다.

「당신 혹시 재인씨랑 결혼이라도 할 마음먹은 건 아니겠지요 ?」

틀림없이 한 자락 깐 목소리였다.

'아하 목적이 이거였군. 웬지 그러리라 짐작은 했지만. 이런 젠장. '

재인씨한테 험악한 말버릇까지 배워버렸다. 국어선생이 쓸 말이 아니라구. 김다현.

「왜 아니겠어요 ?」

다현이 생글생글 웃었다.

「당신이랑 재인씨가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

주희가 낮게 비웃었다.

'저 여자는 이름이라는 호칭을 안쓰는군. 사람을 코앞에 두고 계속해서 2인칭 대명사야.'

아무튼 오늘은 아주 일진이 사나운 날이었다.

「그건 ...주희씨 맞나요? 」

다현이 고개를 갸윳거리며 이름을 생각해내려 애쓰는 척 했다. 물론 맞겠지만.

한 반에 사십 명씩 15반의 이름을 외워야 하는 그녀가 이름을 틀릴 리 없다.

「그래요. 그건 주희씨가 상관할 바 아니에요.」

그녀는 아까 재인이 그의 고모에게 하듯이 무심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허리를 약간 뒤로 젖혔다. 여유있고 느긋하게 살짝 웃으며.

이런 웃기지도 않은 드라마에 주연으로 발탁한 이상황은 무지 기분 나쁘지만 이미 판은 벌어졌다.

다현은 그리 호락호락하거나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의 특별함 때문이라도 다현은 누구보다 전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먼저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에게 숨어있는 우유분단함과 나약함은 현진과 만나면서 많이 고쳐졌다.

현진은 절대 약한 모습따윈 보이지 말라고 몇 번이고 그녀에게 주지시켰다.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상대의 눈을 똑바로 봐. 그리고 절대 흥분하지 마. 먼저 이성을 잃는 쪽이 지는 거야.'

현진은 항상 그녀에게 그렇게 교육시켰고 오늘 현진의 교육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의 난데없는 여유와 때아닌 호기에 주희는 좀 당황한 듯했고 그리고 의혹에 찬 눈빛으로 다현을
주시했다.

「나와도 상관있어요. 당신만 끼어들지 않았으면 난 재인씨와 결혼했을 거에요. 」

주희는 아주 능청스럽게 사실을 왜곡했다.

어차피 그녀는 모를테니까. 그렇지만 눈앞의 여자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녀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호기심도, 관심도 보이지 않고 아주 담담하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녀는 정말 말짱했다.

다현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당신같은 여자가 그 세계에서 견뎌낼 것 같아요 자라난 환경은 절대 무시 못해요. 이런 파티 얼마나 와봤지요?.

이쯤에서 물러서요. 자존심 상해할 것 없어요.」

'고맙기도 하시지.'

다현은 웬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건 진짜 영화야. 삼류 드라마라구. 현진이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면 재미있어서 뒤로 넘어질거야.

43

주희는 어둠속에서도 볼 수 있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유언만 해결되면 재인씨와 난 결혼해요.」

주희가 단언했지만 그녀는 까닥도 하지 않았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두 사람의 결혼 얘긴 나한테 먼저 할게 아니라 재인씨랑 얘기해야지요. 」

'이 여자가 어떻게 유언에 대한 이야기를 알까. 혹시 재인과 나와의 합의도 아는 걸까.'

맘속으로는 궁금했지만 그녀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담담했다. 주희는 다현의 눈치를 세심한게 살폈지만 그녀는 변한게 없었다.

그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이 정도로는 약발이 안받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더 강력하게 밀어붙여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저 촌스러운 학교선생이 두 손을 들고 재인 오빠를 포기할 수 있도록.

「재인씨랑은 벌써 합의된 얘기에요.」

「아닐걸요. 재인씨랑 얘기가 끝났다면 내게 오지 않았겠지요.」

「정말 모르는군요. 그 노인네의 유언만 아니었다면 재인씨는 아직도 나와 만나고 있었을 거에요. 우린 그때 서로 결혼하기로 얘길 했으니까. 」

「재산 때문에 주희씨를 버렸단 말이에요. 재인씨가  ?」

그녀가 놀랍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재인씨가 날 두고 당신을 선택할 것 같나요 ?」

다현의 빈정거림을 알아챈 주희는 약이 올라 상기된 얼굴과 우습다는 듯한 눈길로 다현을 훑어내렸다.

「당신, 그거 알아요?.  그 유언장엔 결혼에 대한 얘기만 있지 이혼에 대한 얘긴 없어요. 당신과 결혼하고 나서 곧 이혼을 해도 아무 하자가 없다는 이야기에요.」

주희는 의기양양하게 다현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이혼이라구 ?. 그때 그 변호사가 뭐라고 얘기했지 ?'

그는 그저 결혼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갑자기 심장이 아파오는 것 같았지만 다현은 표정을 감춘 채 담담하게 주희를 바라봤다.

「그래요 ?. 주희씨도 모르는 것 같군요. 우린 절대 이혼하지 않아요. 재인씨가 그 얘긴 않했나 보지요 ?.
우리 둘 사이의 ... 음..」

'계약이나 거래라고 얘기한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너무 무미건조하고 재미없겠지'

그녀는 이 마녀에게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다현은 의도적으로 말을 끌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하듯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 특별한 사연을 말이에요.」

'우린 결혼하지도 않을테니까. 이혼하지도 않는다구.'

「재인씨한테 들어서 나도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이랑 재인씨가 어떻게 만났는지. 설마 내가 모르리라 생각했나요?」

주희의 말에 다현은 내심 미소지었다. 우리 둘 사이의 거래는 모르는 모양이다.

알고 있다면 이 마녀같은 여자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테니까.

... 그렇다면 이 여자는 전부 진실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당신과 이혼하고 나면 바로 나와 결혼할 거라구요. 재인씨는.」

여선생의 미묘한 표현이 뭔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녀는 자신있다는 어조로 밀어붙였다.

이 순진한 여자가 재인 오빠에게서 제발로 걸어나갈 때까지 그녀는 밀어붙일 셈이었다.

「그건 나와 이혼하고 나서의 이야기니까 그때 이야기하지요. 지금 할 얘긴 아닌 것 같지요 ?.」

「그렇게 해서라도 결혼하고 싶나요 ?.」

시종일관 여전한 다현의 담담한 반응에 주희가 이를 악물었다.

「네.」

그녀가 빙긋 웃으며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다.

「주희씨도 재인씨 포기 못하잖아요.」

다현의 야무진 답변에 주희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내 남자에요. 내게로 올 거라구요. 난 재인씨를 잘 알아요. 아주 어려서부터 그는 내꺼였다구.」

이 반응이라고는 전혀없는, 그러면서 순간순간 사람의 약을 바짝바짝 태우고 신경을 긁고 있는 이 여자에게 주희는 악에 바쳐 소리를 질렀다.

「그렇군요. 」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전히 아주 조용히 말했다.

「재인씨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다면 재인씨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도 알겠군요. 재인씨가 어떤 사람이란 것도. 그는 절대 날 포기하지 않아요. 」

그녀는 여전히 눈썹하나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재인씨와 당신의 얘긴 내가 결혼하고 나서 듣지요,」

그녀는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디 한 번 해보라는 식으로.

44

「지금 집에 가고 싶어요.」

「지금?」

재인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다현을 아직 식구들한테 인사도 시키지 못했다.

「지금이요. 안데려다주면 나 혼자라도 갈 거에요.」

다현이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그녀의 얼굴은 약간 상기된 듯 했지만 그 표정만큼은 절박했다.

다현을 잠시 주시하던 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하지만 무슨 일이야 ?. 」

재인은 다현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얼굴표정의 다현은 처음이었다.

화가 잔뜩 나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는 재인의 어떤 질문에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무슨 일일까. 또 고모가 그녀에게 다가가 뭐라고 몰아댄걸까. '

재인은 다현의 침묵시위의 이유가 궁금했다.

'만에 하나라도 고모가 뭐라고 했다면 이번엔 절대 참지 않으리라.'

「말을 해야 알 거 아니야.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심술이 났는지?」

'심술이라고 ?'

그녀가 재인을 노려봤다.

「또 우리 고모가 뭐라고 해? 그래서 이러는 거야 ?.」

'아뇨. 당신식구들은 더 이상 암말 안했어요. 대신 당신 여자친구가 떠들더군요.' 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유치하다 싶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화가 나서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지만 그랬다간 재인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으리라.

거기다 재인이 준비한 이 특별한 차를 운전하고 있는 저 앞의 운전기사는 내 얘길 전부 듣고 있겠지.

하루 저녁 두 명의 마녀는 내게 너무 심했다.

도대체 저 남자는 왜 이렇게 적도 많고 팬도 많은 거야. 그러면서 나보고 딴 남자를 만나지 말라고.

그녀가 눈에 불을 키고 노려보고만 있자 재인은 더욱 궁금해졌다.

「얘기해 보라구.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났는지?」

「당신하고는 한 마디도 하기 싫어요. 그리고 앞으로 결혼하고 싶으면 나한테 먼저 물어보라구요. 그 상대가 나라면요.」

마지막말은 재인만 들을 수 있게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뜻이야 ?.」

「난 (당신이랑 결혼하겠다고) 예스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뜻이에요.  」

그녀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앵도라져서 조그맣고 날카롭게 쏘아댔다.

「이것 봐. 그런 소릴 하려면 내 얼굴이라도 보고 얘기해야지.」

재인은 다현의 얼굴을 자신쪽을 돌려놨지만 다현은 재인을 한 번 흘겨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집에 가는 내내 다현은 재인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화를 내고 있었다.

오늘 파티가 잘 될 줄 알았는데. 재인은 한숨을 쉬었다.

「잠깐 어디 가서 얘길 하고 가자고.」

「이러구 어딜 가요 ?.」

그녀가 다시 쏘아붙였다.

그와 그녀의 복장은 호텔의 파티장에선 더할 나위없이 어울렸지만 다른 곳에선 아무래도 눈에 띄는 옷차림이었다.

재인은 답답하다는 듯이 짧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내렸다.

「계속 이렇게 화 낼거야 ?」

집 앞에 도착한 재인이 기사보다 먼저 차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네. 그럴 거에요. 」

그녀는 말을 던지자 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들어갔다.

예상했던 대로 현진은 다현의 이야기를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 난 약올라 죽겠는데.」

「파티라는 대단한 데가 확실히 재미있는 일이 많구나.」

「재미 하나도 없었어.」

다현이 심술을 부렸다.

「재밌는데 뭐. 그러니까 먼저 늙은 마녀가 넌 아니라고 소리를 박박지르고....」

「어린 마녀도 마찬가지였어.」

다현이 재미있어 하는 현진을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재인씨가 그녀하고 사귄거 같기는 하구 ?」

「몰라. 워낙에 자기 얘긴 안하니까. 못 묻겠더라구. 자존심 상해서.」

「그런거 걱정하지마. 만약에 진짜 그새끼 마녀랑 재인씨가 사귀었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야. 그러니까 몸이 달아서 너한테 온거야.」

현진이 키득거리며 얘기했다.

「아마 지금도 만나고 있는 모양이야. 그러니까 유언장 얘길 알지. 」

그녀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어디서 주어 들었겠지.」

「아니야. 그 얘긴 공개되지 않았다고 했어. 재인씨가.  」

「그럼 직접 물어보지 그랬어. 어떻게 된거냐구」

「아까 얘기했잖아. 자존심 상해서 못 물어 보겠더라구. 거기다 그 사람은 나한테 한번도 사랑한다고 안했단 말야. 」

드디어 다현이 소릴 질렀지만 현진은 그저 키득거릴 뿐이다.

'그거였군, 이재인라는 남자가 사랑고백하지 않은 사실이 이 특별한 여자를 불안하게 하는 거였군.'

「바보 아니야. 너. 사랑하는데 무슨 자존심. 그리고 네가 먼저 고백하면 되잖아. 그건 왜 안되는데 ?」

.... 나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럴까봐 겁나. 현진아. 그 여자 말대로 유산 땜에 어쩔 수 없이 결혼은 하겠지만 사랑같은 건 아니라고 얘기할까봐 못하겠어.

정말 그 여자 사랑하면 어떡해 ?

맘속으로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이 그녀를 자신없게 했다.

다현이 예전에 고친 버릇인 입술을 쥐어 뜯었다.

「내가 보기엔 그 여잔 절대 아니야. 자신이 유리한 패를 들고 있는데 몸 달아서 나올 이유가 없다구. 진짜 자신있음 재인씨를 조종하지,

네게 와서 그러지 않아. 내 말을 믿어.」

현진이 그제야 웃음을 멈추고 다현에게 얘기했다.

「그렇지? 나도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어떻게 그 여자가 그걸 아냐구 ?. 거기다 이혼 얘긴 나도 처음 듣는 얘긴데.」

「웬 이혼? 넌 결혼도 하지 않을 거랬잖아. 그럼 상관없는 얘기 아니야 ?」

현진이 다현을 약올리며 빈정거리자 다현이 그녀를 노려보며 뭐라고 쏘아붙이려고 할 때  다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받으라는 듯 현진이 핸드폰쪽을 쳐다봤지만

다현이 야무지게 핸드폰의 밧데리를 빼냈다.

「안받을거야. 나 열 받았으니까 자기도 좀 열받으라고.」

「나라면 그 여자가 어떻게 아는지 궁금해서라도 전화받을텐데.」

그녀는 재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아냐. 이 사람 약올리는 쪽이 우선이야.」

45

그 여선생은 정말이지 까딱도 하지 않았다.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고 숨소리조차 달라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어찌되었던 재인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아니면 ... 누가 뭐라고 그래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던지... 그건 아니니라.

누가 재인 오빠 같은 사람을 포기하고 싶겠는가.

더욱이 길가던 강아지 같은 그녀가 재인오빠 같은 사람을 어디서 또 만날 수 있겠는가.

원래 그런 수준의 사람들은 좀 질긴 데들이 있으니까. 사랑 어쩌구 하면서 떨어지기 쉽지 않지.

하지만 그녀가 일고 있는 로얄패밀리들은 사랑 때문에 결혼하는 부류들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주희는 재인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 촌스런 젊은 여선생한테 자신이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걸 넘겨 줄 수는 없다.

아직 방법은 있다. 이런 방법까지 사용하고 싶진 않았지만.

주희는 약이 올라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손에 쥔 무기를 어디다 사용해야 할 줄 아는 여자였고 이제 누굴 상대로 그 무기를 팔아야 할지도 아는 여자였다. 그녀도 정말 이렇게 까지 하긴 싫었다.

하지만 할 수 없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민태하씨 좀 부탁합니다.」

다현은 시간을 보고 한숨을 지었다. 방학때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아이들 생활부 정리하는 일은 별루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벌써 일곱시다. 주위는 어느새 깜깜해져 있었다.

찬바람에 몸을 잔뜩 움추린 채 교문 밖으로 나오던 다현은 다시 머리를 저었다.

또 핸드폰을 두고 나왔다.

심통이 나서 하루종일 재인에게 전화를 걸지도 않고 핸드폰도 꺼났지만 이제 서서히 - 아니 어제 핸드폰의 전원을 끄는 순간부터 -

그에 대한 심술보다 목소리를 듣고 싶고 만나고 싶은 맘이 앞서고 있다.

그리고 아마 지금쯤은 재인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으리라.

스스로가 못마땅해서 투덜거리며 다시 학교로 발걸음을 돌리는 순간 무언가 입을 막았고 다현은 곧 의식을 잃었다.

다현은 의식을 잃는 그 잠깐동안 재인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보고 싶어. 엄마보다. 아빠보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 더.

태하는 주희가 그의 앞으로 보낸 선물 - 거실 긴의자에 누워 있는 여자를 보고 약간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가 아니야. 내가 생각한 그 여자가 아니라구'

한주희가 실수할 리가 없다. 하지만 이여자는 그가 원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날 오후 강남의 바에서 본 붉은 옷의 섹시한 - 한눈에 그를 사로잡고, 갖고 싶은 욕망에 몸을 떨게 한,

그리고 그후로도 계속해서 그의 꿈자리를 어지럽히고 있는 그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날 분명히 그 여자가 만난 남자는 재인이었는데.

한 번도 사촌인 재인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니 느낄만한 틈도 없이 재인은 앞서 나갔다.

할아버지의 총애와 그의 두 외가의 든든한 조력, 거기다 타고난 능력까지.

하지만 그녀 - 붉은 옷의 마녀가  재인을 향해 웃음지을 때 생전처음 그는 사촌에 대한 경쟁심과 질투. 부러움을 느꼈다.

그는 재인이 여태 가지고 있던 어떤 것보다 그 여자가 탐이 났다.

그래서 주희가 이 일을 제안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이 위험한 일에 끼어든 것이다.

이제 와서 발을 뺄 수는 없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다. 비록 그가 꿈꾸고 있는 여자가 아니었지만.

그의 품안에 재인의 여자가 굴러 들어온 것이다.

'그래, 이 여자가 할아버지의 상속녀란 말이지. 그 영감의 어마어마한 재산이 이 여자 뒤에 있다고. 거기다 재인의 여자이기도 하고.'

태하는 그의 앞에 무방비하게 누워있는 여자의 매끄러운 볼과 탐스러운 목덜미까지 긴 손가락으로 훑어 내리고 어두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그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굴러들어온 기회를 놓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태하는 축 늘어져있는 여자를 번쩍 안아들고 그의 침실로 옮겼다.

46

다현은 전화조차 받질 않는다. 화가 엄청 난 모양이다.

그 덕분에 재인은 오늘 하루 기분이 엉망이었다.

사무실 직원들은 그를 피해 다녀갔고 급기야 비서인 유경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최과장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회식비를 찔러주었다. 지금쯤 엄청 그를 씹고 있으리라.

그는 혀를 찼다.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사무실을 공포분위기로 만드는 짓은 한심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 야금야금 스며들고 있는 이 불안감과 초조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육감과 판단력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11시 넘어 걸려온 서현의 전화는 그를 더더욱 불안하게 했다.

「도대체 그럼 애가 어디로 간거야?. 지금 들어오겠다고 전화한 애가.」

금방 집으로 간다고 연락하고는 저녁시간을 넘어서까지 안들어오는 다현을 서현은 현진과 재인에게서도 찾을 수 없자 답답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 연락할 만한데도 없구?」

「아직까지 한 번도 이런 일 없었어. 늦으면 늦는다고 꼭 전화하는 애란 말이야. 그게 보기엔만 그렇지 겁이 엄청 많아서 밤늦게 혼자 나다니질 못한다구.」

「별일 없을거야. 나도 알아볼테니까. 친구들한테 연락좀 더 해보라구.」

'별일 없을거야.'

그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었다.

어제오늘 하루종일 다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저 내게 심술이 나서 그려려니 하고 조금은 시간을 주어야지 하고 스스로를 자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다가 없다.

다다의 전화에선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고 다다는 지금 집에도 없다.

아직 11시 20분. 그에게는 많이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평소의 다다에겐 늦은 시간이다.

그와 함께 있을 때조차도 귀가 시간만은 항상 챙기던 그녀였다.

'별일 없을 거야. 아직 11시밖에 안됐다구. '

7시쯤 집에 들어간다고 했으니까 이제 겨우 4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아마 친구를 만난다거나 혹은 쇼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괜히 소란을 피우는 일이야. 11시면 바깥은 아직 대낮이나 마찬가지야.

친구들과 얘기하다보면 조금은 늦을 수도 있지.

맘속으로 밀려들어오는 불안감을 애써 잠재우며  재인은 스스로에게 얘기했다.

......하지만..........재인과 함께가 아니라면 11시를 넘어서 집으로 가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 그녀.

아무래도 불안한 재인은 윤후를 통해 다현을 수소문했다.

혹시라도 다현에게 무슨일이 있다면 윤후의 넓은 발을 이용하면 대충 다다의 흔적을 찾아내리라.

재인은 심장이 조여드는 불안함에 초조해졌다.

그날 다툰 다음에 바로 확실하게 얘기했어야 했는데. 그냥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재인의 초조함이 극에 달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재인이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친애하는 사촌께서는 잘 지내시는지?」

태하의 낮고 느릿한 음성에 재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끊어라. 바빠.」

「나야 급한게 없으니까. 하지만 사촌은 그렇지 않을텐데. 생각보다 이 여자가 중요하지 않은가 보군」

재인은 그냥 전화를 끊으려다 태하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에 어깨가 굳어졌다.

핸드폰이 꽉 잡은 그의 손에서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재인이 말을 하려 했지만 이미 태하의 전화는 끊겨 있었다.

그의 얼굴표정은 차갑게 굳어졌고 두 눈만이 맹렬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47

재인이 태하가 살고 있는 빌라의 현관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아마도 아래층 경비실에서 미리 연락을 했으리라.

「기록적인 시간인데. 신호는 전부 무시 했나 보지 ?」

새까만 머리에 짙은 눈동자를 지닌 태하는 얼핏 보기에도 위험스러운 냄새가 풍겼다.

「어딨니? 」

「내 방 침대에.」

태하의 의도적인 답변에 재인의 눈썹이 약간 올라갔지만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태하가 앞장서 자신의 침실로 생각되는 방문을 열자 침대 위에는

다현이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다현 앞에 다가가 큰손으로 볼은 더듬는 재인은 그제서야 어깨가 풀린 모습이었다.

「마취약에 좀 취한 거야. 지금은 잠들은 거구. 」

「김박사님한테 연락해.」

재인은 다현에게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 아가씬 잠든 거라니까. 12시가 넘었어. 그 노인네도 잠들 시간이라구. 」

「연락해.」

재인의 단호한 명령에 태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래도 저 고집은 이기지 못하리라.

「그냥 잠든 거야. 그만 얼굴 좀 돌리라구.」

태하가 다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재인에게 빈정거리 듯 말했다.

「커피? 아니면 알콜도 있어」

태하는 자신의 몫으로 커피를 따르고는 재인에게 물었다.

「찬물.」

「누구 짓이냐?」

재인은 태하에게 얼음이 담긴 냉수를 건네받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내 짓이라고는 생각 안하지?」

태하는 자신의 자리에 자리를 잡으며 느긋하게 물었다. 어차피 급한 건 그가 아니다.

「네 짓이었으면 나한테 전화 안했겠지.」

당연하다는 투로 재인이 말했다.

「그리고 이런 위험한 일을 저지르기엔 넌 너무 머리가 좋아」

재인의 냉정한 말투에 태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영광인데. 사촌한테 그런 칭찬을 받다니. 」

「누구야?」

재인은 태하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범인을 추궁했다.

「한주희.」

태하의 간단한 답변에 재인의 눈빛에 불꽃이 일었다.

「어디선가 주어들은 모양이야. 대장 속셈을. 」

재인의 눈빛이 더욱 진해졌을 뿐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자 태하는 말을 이었다.

「나랑 협상하자더군. 난 SH를 갖고 자기는 사촌을 갖겠다고.」

지금 재인이 화가 났다고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짙어진 눈빛과 꽉 다문 입술뿐이었다.

「아무튼 대단한 사촌이야. 수백억대 재산보다는 사촌이 더 탐났던 모양이야.」

태하는 좀처럼 동요를 보이지 않는 재인의 태도에 약이 올라 빈정거렸다.

「빚을 졌다.」

오랜 침묵 끝에 나온 재인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네가 원하게 뭐야. 내 손에서 들어 줄 수 있는 건 해줄테니 말해」

재인의 손에서 해 줄 수 있는 일.

그것은 거의 모든 일을 의미한다. 신의 영역에 있는 일을 제외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

재인도 태하도 지금 재인이 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다.

'어. 그렇게 대단한 여자였나'

태하는 재인의 놀라운 제의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에 대해서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어떤 여자이기에 저 냉혹한 사촌이 저만큼 양보하는 것일까.

「얘기해봐. 원하는게 있으니까 나한테 연락한 거 아니야. 」

「백화점. 완전한 경영권.」

태하의 나른하고 느긋한 이제까지의 표정이 바뀌었다.

「지금도 그건 네가 하고 있잖아.」

비록 그의 아버지 그늘에 있긴 해도 실질적인 SH백화점의 경영자가 그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무언가 있어. 사촌도 알텐데. 지금 백화점 주위에 뭔가 냄새가 난다는걸.」

태하의 말에 재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무슨 일을 벌이는 것 같아. 눈치챌 수 없도록 서서히.」

백화점을 둘러싸고 뭔가 있다는 건 재인도 이미 오랜 전에 알아차린 일이다.

아마도 태하는 재인처럼 백화점을 향한 무언가의 움직임에 대해서 온몸을 긴장시키고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디에서 그 꼬리를 잡아야 할지 몰랐으리라.

적이 정확하게 누군지는 알 수 있다면 방어도 공격도 할 수 있지만 아주 조금씩 조금씩 냄새를 피워가며 움직이는 세력들을 잡아내기란 쉽지가 않다.

「사촌이 호텔 일에 목맨 거처럼 나도 이 일이 맘에 들어. 첨부터 내가 한 일이라구.」

「그래서? 뭘 해주면 되겠니?」

「아버지는 아직도 SH본사에 눈길을 주고 있는 모양이지만 난 아니야. 지금 하는 일이 좋아. 사촌 역시 아직도 백화점에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있지만 이건 내거야.

내가 하고 싶다구.」

그가 맹렬한 소유욕을 내보였다.

「거기다 먹이가 제발로 걸어왔어.」

무슨 뜻이냐는 듯 재인의 표정이 바뀌었다.

「한주희. 주희 말로는 한주그룹이 아버지랑 결탁한 것 같거든. 화장품이나 팔아 먹고 있을 것이지...」

태하가 냉정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으음...여러모로 한회장이 딸을 잘못 키웠군.

재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곤 아무 말없이 전화기를 들었다.

「윤후니? 미안하다..... 다현이 찾았어...... 태하네 빌라.....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 몇가지 알아봐줘.... 한주그룹 자금사정이랑 흐름 좀 둘러봐. 응....

백화점쪽하고....오케이. 내일 세시쯤 호텔로 와라. 응...그래... 괜찮아. 잠들었어.....한주희 짓이란다. 그래. 미안하다.」

재인의 전화통화에 태하의 눈썹이 다시 올라갔다.

「대단한데 사촌. 이 한밤중에 황금손이라는 사람을 전화 한 통화로 부리게.」

재인은 태하의 말을 여전히 무시한 채 전화를 계속했다.

「이재인입니다. 김비서님 죄송합니다. 쉬시는데. ... 저 곧 회사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재인의 말에 다시 태하의 눈썹이 올라갔다.

아마도 전화받는 김비서는 잠이 왕창 깼겠구만.

「네. 내일 회장님께 말씀드릴 겁니다....아뇨... 아무래도 호텔일 마무리하려면 두 달은 있어야 .... 네... 한주그룹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세요. 뭐든지 말입니다....

예....그리고 민혁주 이사에 대해서도 알아보세요....아닙니다. 개인적인 부탁이 아니라 회사 일입니다.. 전부 조사해서 내일 저희 호텔로 나오세요.  밤늦게 죄송합니다.」

개인적인 부탁이 아니라 회사일.

그 한마디는 SH에서 그의 영향력을 확실히 하는 말이다.

재인이 회사로 컴백한다면 그는 차기 회장감이다.

그가 갖고 있는 회사주식은 물론이고 현 회장이 그를 얼마나 욕심내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제 그는 차기 회장으로서 첫 지시를 내렸다.

버티고 버티던 이재인이 화려하게 컴백하는 것이다.

48

「한주희라구? 미쳤군...」

윤후는 머리 끝까지 화가 오른 재인의 얼굴을 그려볼 수 있었다.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주희가. 감히 재인을 건드리다니.

어차피 이 세계에도 떠오르는 해도, 지는 해도 있는 세상이다.

재인은 주목받고 있는 기업가중에 가장 앞서 나가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그 존재가치만으로도 만만히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가장 탄탄하고 영향력 있는 재계에서도 현금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SH의 차기 오너인 것이다. 그런 그를 상대로 위험한 도박을 한다니.

미치지 않고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재인도 그의 할아버지인 회장도 절대 빚을 잊지 않는다.

그가 갚을 빚도. 받아내야 할 빚도.

재인이 살아있는 한 이제 한주희를 절대 그냥 놔두지 않을 테다.

윤후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윤서를 불렀다.

동생에게 선을 긋는게 현명한 일이다.

이 상황에서 윤서가 친구인 주희를 감쌌다가는 재인의 어마어마한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 내야하리라.

그가 가장 아끼는 친구의 분노를 도와주지 못할망정  방해가 되어서는 안되었다.

비록 그의 짐이 해결되지 않더라도.

재인은 의사가 가고 난 후 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현의 분노는 거의 그와 맞먹는 상태였다.

그는 재인에게 노골적인 불신을 내보이며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 올 기색이었고 재인은 그런 서현을 달래느라 진땀을 뺏다.

결국 내일, 아니 오늘 아침에 달려오는 것으로 타협을 보고 재인은 피곤한 기색으로 전화를 끊었다.

「신세지는 김에 한 가지 더 부탁하자. 」

재인이 무지막지하게 전화로 공세에 몰리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태하에게 재인이 말했다.

「차 좀 대.」

「사촌 차는?」

「내가 운전할 수 없어서 그래.」

재인은 태하를 무시한 채 시트 채로 감싼 다현을 안아들었다.

태하는 자고 가도 된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재인은 절대로 그의 여자를 태하의 침대에 눕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졸지에 운전사가 되어 한밤중에 차를 몰고 그의 사촌의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것 보라고. 김박사님이 그냥 잠든 거라잖아.」

다현을 무릎에 앉힌 채 조금의 차의 진동에도 보호하려 하는 재인의 모습에 기가 차서 태하가 내던지듯이 말했지만 재인은 그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아기 돌보듯

그녀를 돌보고 있었다.

의사는 마취제를 지나치게 흡입했고 지금은 잠든 상태라고 하지만 재인은 다현이 다시 깨어나지 못할까봐 조바심내고 있었다. 잠든 상태라는데 왜 깨지 않을까.

재인은 다현의 하얀 얼굴을 곱게 쓰다듬고 있었고 그런 그의 생소한 모습에 태하가 헛웃음을 켰다.

다현은 재인의 집에 거의 다와서야 눈을 떳다.

「으응...」

아주 약하게 나온 다현의 음성에 재인이 재빠르게 반응했다.

「다다야. 정신나?.」

「...어, 재인씨.」

그녀의 목소리는 가냘펐다.

「괜찮니? 어디 불편한데 없어? 」

재인이 다현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고 혹여나 다다가 불편한지에 대해 꼼꼼히 쳐다보고 있었다.

「재인씨, 물...」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다현이 물을 찾자 재인은 운전하고 있는 태하에게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편의점 앞에 차 세워. 」

태하의 잘빠진 포르쉐의 냉장고는 아쉽게도 비어 있었다.

재인의 지시에 태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길가의 편의점으로 차를 세웠다.

「생수 좀 사와.」

여전히 다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재인이 지시하자 태하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안전벨트를 풀었다.

천하의 민태하가 한밤중에 기사 노릇에 물 심부름이라구.

49

재인의 아파트로 온 다현은 다시 잠이 들었다.

재인은 그의 침대에 누운 다현을 보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하의 집에서 오는 동안 내내 그는 다현이 어디로 날아갈 듯한 심정에 조바심냈었다.

여전히 다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재인을 보고 태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고맙다. 오늘일.」

재인의 인사에 태하는 눈썹을 치켜올릴 뿐이었다.

「앞으로 사촌이 내게 해줄 일에 내가 더 고마워.」

「사촌이라고 하지말고 형이라고 해. 넌 나보다 일 년이나 어려.」

「일 년이라고 ? 정확하게 6개월이라구.」

재인은 9월생이고 태하는 3월생이다. 하지만 재인은 태하가 사촌이라고 빈정대듯 불러대도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태하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뭐라 부르든 상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태하도 재인이 자신한테 반응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더욱 빈정대듯 사촌이라고 불러댔었다. 그런 그가 이제 자신을 형이라 부르라 한다.

「어쨌거나 너랑 나랑은 해가 바뀌었어. 이제부터 제대로 불러. 그게 아마 너희아버지를 상대하기도 유리할 거야.」

재인이 동생으로 인정한다면 태하에게는 어마어마한 지원군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을테다.

재인이 그의 가족에게는 끔찍할 정도로 헌신적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말이다.

그는 아무 말없이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문을 나섰다.

'한주희. 두고 보자구. 감히 내게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살아갈 수 있나 어디 보자구.'

태하가 떠나고 나서 재인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감히 다현에게, 내 사람에게 손을 대다니. 이제부터 지옥이 어떤 건지 보여주지.'

그의 차가운 얼굴을 만약 주희가 보았다면 그 얼굴만으로도 공포에 질릴 정도로 무시무시하였다.

재인은 다현의 하얀 얼굴에 가만히 입술을 갖다댔다.

"미안...다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거야. 맹세해."

그는 조금은 풀린 표정으로 다현의 옆자리에 누웠다.

다현이 눈을 뜬다면 펄펄 뛰겠지만 오늘 하루종일 노심초사한 그에게는 다현의 온기가 필요했다.

재인이 침대에 눕자 다현이 잠결에 그에게 다가왔다. 따뜻하고 조그마한 몸이 재인에게 안겨오자 그는 깊은 만족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가, 그리고 그가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귓가에선 작은 북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새벽녘에 잠이 깬 다현은 기겁을 했다. 무언가 그녀를 무겁게 감싸안고 있었다.

그녀의 허리 사이에 놓인 묵직한 물건은 틀림없이 재인의 손이리라.

왜 그녀 옆에 누워있는 사람이 재인이라 믿는 줄은 모르겠지만 다현은 틀림없이 자신에게 온기를 전하고 있는 사람이 재인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깼어? 」

재인이 다현의 조그만 움직임에 몸을 일으켰다.

「음. 여기 어디에요?」

「우리집. 당신 괜찮아?」

재인이 다현의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를 키자 갑작스러운 불빛에 눈이 부신 다현은 얼굴을 찡그렸다.

불빛을 최대한 죽인 재인은 다현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

재인이 다시물었다.

「응.」

다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나 왜 여기에 있어요?」

다현이 조그만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별일 아니야. 신경쓸 거 없어. 다다는. 근데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덴 없구.」

재인이 다현의 이마에 걸려있는 젖은 머리카락을 치워주며 다시 확인했다.

「...으응. .... 근데, 왜...」

다현이 뭔가를 말하려고 하자 재인이 중간에서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럼 더 자. 중요한 건 내일 얘기하구. 아직 아침 오려면 멀었어.」

재인은 스탠드를 끄고는 다현을 감싸안았다.

「안 졸려요. 」

「그래도 자야 해」

「머리 아픈데.....」

다현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소리에 재인이 벌떡 일어났다.

「진작 말했어야지.」

다시 스탠드를 켠 재인이 근사한 몸매를 드러내고 팬티만 입은 채로 일어서서 기세좋게 움직이자 얼굴을 붉힌 다현이 얼굴을 돌렸다.

「안그래도 김박사님이 약 주시고 갔는데. 머리 아플거라고 했어」

재인은 다현에게 약을 먹이고는 어린아이 다루듯이 그녀를 침대에 누였다.

「이제 괜찮아질거야. 이제 정말 아무도 다현이 못 건드리게 할게. 맹세해」

마지막 말은 자신에게 다짐하는 듯 재인은 조그맣게 중얼거리고는 듯 다현의 얼굴을 올리고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재인은 조심스럽게 다현의 입술을 쓸어내렸다.

약기운으로 약간 메말라 있는 그녀의 입술을 그의 타액으로 촉촉하게  살짝살짝 물려있는 그녀의 이 사이로 혀를 들이밀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다현의 입술은 머뭇머뭇 재인의 입술을 받아들였고 재인은 혀끝에서 느껴지는 다현의 숨결과 향기에 매혹당했다.

안도와 위로에서 시작한 키스는 어느새 미묘한 정열로 변해가고 있다.

50

조용한 침묵과 따뜻한 어둠속에서 재인의 손이 천천히 다현의 등을 어루만지며 달래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던 재인의 손이 좀더 노골적으로 그리고 미묘하고 친숙하게 변하고 다현은 그의 품속에 얼굴을 묻은 채 그가 전해주는 즐거움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재인은 작음 신음소리와 다현의 입술이 열리고 부드러운 다현의 혀가 조심스럽게 움직이자 밀려드는 기쁨에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다현의 가늘고 작은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에 얽히고 재인은 그녀가 주는 쾌감에 몸을 떨었다.

「으..음」

재인은 다현의 입술에서 그녀의 하얀 목으로 범위를 점차 넓혀나갔다.

다현이 입고 있는 재인의 티셔츠는 가슴위까지 밀려가 재인의 긴 손가락이 조그만 다현의 가슴을 감싸고 있었고 어느새

다현의 몸위에 올라간 재인은 흥분으로 단단하게 굳어진 자신을 밀어붙였다.

「너무 부드러워」

다현은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채 재인의 애무에 열렬하게 반응했다.

트렁크만 입고 있는 재인의 몸은 맨살의 부드러운 다현의 몸과 빈틈없이 부딪혔고 딱딱하게 굳어진 남성은 다현의 아랫배에 고스란히

그 열기를 전하면서 조용한 방안이 둘의 거친 호흡으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우와...미치겠다....그만.」

재인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현의 가슴과 따뜻한 몸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였다.

「재인씨...나...」

다현은 재인의 목에 팔을 감고 자신도 모르게 재인을 끌어당겼다.

「안돼....더 ....조금...... 더하면... 못 참을 것 같아.....」

재인은  다현의 이마에 머리를 맞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 갖고 싶어 ... 안돼... 지금은.」

0.재인은 팔꿈치로 자신의 체중을 실은 채 흥분한 자신의 몸을 가라앉히려 했다.

「...오늘은 자야 돼.....」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다현은 두 사람이 얽혀있는 노골적인 자세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순진한 다현이지만 아직도 그녀의 아랫배를 자극하고 있는 재인의 몸이 뭘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어..난 .... 」

다현은 허둥지둥 재인을 뿌리치고 티셔츠를 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현의 당황한 몸놀림에 재인이 쿡쿡거렸다.

「괜찮아. 더 안해. 이젠 조용히 진짜 잠만 잘거야.」

아직도 흥분으로 딱딱한 자신의 몸을 진정시키면서 재인이 그녀를 품안으로 끌어들였다.

「좀 자야 돼, 자고 나면 개운할 거야.」

재인은 다현을 품안에 깊숙이 안고 말했다.

다현은 그의 가슴에 푹 파묻혀서 두 팔로 그의 허리를 안고 옅은 한숨을 쉬었다.

단단한 가슴의 심장소리와 따듯한 온기가 낯설지도 싫지도 않았다.

「이러구 어떻게 자요?」

다현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외동딸인 다현은 아주 어려서부터 혼자 자는 버릇이 몸에 배어 있었고 더더구나 남자 몸에 안겨서 자본 일은 생전 처음이었다.

「나도 못 잘 것 같아. 아마 사리 생길 거야. 하지만 우리 이러구 자보자구.」

재인이 킥킥거리고는 더 깊이 안아 다현이 몸안에 푹 안기도록 했다.

「답답해요. 그리고 재인씨 ...숨결이 닿는단 말이에요. 」

「난 좋은데. 아까는 싫어하지 않았잖아」

재인은 그의 숨결이 다현의 이마에 스치는 것도 다현의 숨결이 그의 가슴에 따뜻하게 와닿는 것도 모두 맘에 들었다.

물론 채워지지 않은 그의 몸 아래쪽은 다현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지만.

「아까는 .... 」

그녀가 뭔가 변명을 하려다 안되겠는지 다시 새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난 간지러워요. 숨 닿을 때마다. 」

「그럼 이렇게 하자 」

재인은 다현을 그대로 뒤로 돌려 안았다. 등뒤쪽에서 한쪽 팔을 다현의 머리 밑으로 둘러 그의 어깨를 베게 하고는 나머지 팔로 그녀의 허리를 그의 품으로

바짝 끌어 안아 다현의 등이 그의 가슴에 닿게 했다.  그리곤 다현의 머리에 턱을 대고는 만족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러면 됐지?」

'아뇨. 전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가슴한쪽에 떡하니 놓아있는 그의 손도 맘에 걸렸고 그녀가 한밤중에 도망이라도 갈 것처럼 그녀의 다리를 감고 있는 - 틀림없이

맨살인 그의 다리도 너무 무거웠으며 다현의 머리카락에 살짝 내닿고 있는 그의 호흡도 그녀를 불안하게 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나아진 자세였다.

재인은 어디선가의 소음소리에 잠이 깼다. 6시였다. 워낙에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배어있는 그였지만

가슴 졸이고 애를 태우고 시간을 보낸 어제하루는 피곤하고 힘든 하루였다. 하지만 재인은 왠지 모르는 만족감에 눈을 떴다.

어젯밤엔 간지럽고 무겁다며 투덜대던 다현이 그의 품안에 폭 안긴 채였다.

그의 한쪽 어깨에 머리를 대고 있는 다현은 한쪽팔은 그의 허리에 걸치고 다리는 그와 엉킨채 그의 가슴에 안겨 색색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아주 맘에 드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다현의 깊게 감은 속눈썹에 살짝 입을 맞춘 재인은 그를 방해하는 소음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누군가 계속해서 현관벨을 누르고 있었다.

재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잊고 있었다. 다현의 그 얼음장 같은 오빠를.

아마도 어제 한숨도 안자고 해가 뜨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왔으리라.

재인은 바깥의 소음소리가 다현을 깨울까 염려되 조심스럽게 일어나  바지를 급하게 찾아입고 거실로 나갔다.
서현은 벌거벗은 몸에 겨우 바지만 대충 챙겨입고 나오는 재인은 노려보았다.

「다다는?」

「아직 잠들었어.」

서현은 재인은 나온 침실로 성큼성큼 밀고 들어갔지만 재인이 재빨리 제지했다.

「좀 더 자게 둬. 깰 때 됐어. 커피나 한 잔 마시며 기다리라구.」

「깨울 생각 아니야. 제대로 있는지 확인해야겠어.」

서현이 여전히 재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끙... 재인은 한숨을 쉬었지만 말릴 수가 없었다. 다다의 고집불통은 아마도 집안의 내력인가 보다.

다현을 보고 나온 서현은 재인은 향해 오만 인상을 다 찌푸렸다.

그는 다현이 다른 남자의 침대에 누워있는 것도 생소했고 그의 어린 여동생의 목에 희미하게 나있는 그 남자의 흔적도 아주 맘에 안들었다.

더더군다나 소중한 동생이 이 앞에 있는 남자 때문에 끔찍한 시련을 당했다는 사실이 영 기분 나빴다.

「난 자네가 내 동생을 확실하게 보호해 줄줄 알았어.」

「미안하게 됐네. 내 실수야.」

재인은 실수를 인정했다. 본인도 자신의 잘못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되지 않도록 이미 손을 쓴 상태였다.

「정말 맘에 들지 않네. 자네를 믿지 못하겠어.」

자초지종을 다들은 서현의 분노는 그야말로 펄펄 뛰었다.

「무슨 뜻인가?」

「내 동생을 데려가겠다는 거야. 백주대낮에 다다가 그렇게 됬는데 아무도 막지 못했어.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었다면...맙소사.」

서현은 혹시 있었을지도 모를 불상사를 상상하고 몸소리를 쳤다.

「자네에게 믿고 다다를 맡기지 못하겠어.」

그는 모질게 재인을 밀어붙였다.

「진정하라구. 다신 이런일 없을거야. 절대로」

재인은 그를 향한 서현의 불신에 할말이 없었다.

그 자신도 혹시 있었을지 모를 불상사를 생각하면 몸 속의 피가 다 마를 지경이었다.

「절대로 절대로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약속하네」

그는 다짐하듯 말했다.

「널 만나기 전엔 내 동생한텐 이런 일은 없었다구.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그 여자가 내 동생을 노리냐구」

서현은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릴 질러댔다.

「내 동생 상대로 양다리 걸치고 있었나?」

「소릴 죽여. 다다 깨겠어. 그렇지 않다는 건 자네가 더 잘 아는 일 아닌가. 그리고 이번 일은 나도 절대로 그냥 넘어가질 않아.」

재인이 소리를 죽여 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태어나서 이만큼 궁지에 몰리기는 처음이었고 이만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어젯밤처럼 피가 마르는 경험을 한 것도 처음이었다.

「어떻게 할건데?」

서현은 재인의 처분결과에 대해서 집요하게 질문을 해댔다.

「어떻게 하길 바라나?」

「그 여자 쳐 넣으라구.」

서현이 딱 부러지게 말했다.

「납치는 엄연한 범죄야. 결과와 상관없이. 자네의 개인적인 처분은 나랑은 관계없어. 법적으로 처분받길 원해」

「법적 처분은 일이 커질텐데.」

「상관없어. 어차피 납치는 인지사건이야. 고발없이도 경찰에서 조사해야 하는 일이야. 아마 기자들이 달려들면 타격이 좀 크겠지.」

서현은 표정없이 말을 이었다.

「자네가 안한다면 내가 하네. 내게도 그 정도의 힘은 있어.」

재인은 차가운 서현의 얼굴을 보고 그리 밝지 않은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는 나와 닮은 구석이 너무 많아. 걱정하지 말라구 이 친구야. 나도 절대로 그냥 물러서지는 않아. 날 건드리고 이제까지 무사한 사람은 없었네. 」

재인의 확고한 결심이 섞인 표정에도 서현은 찡그린 얼굴을 풀지 않았다.

사실 재인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재인의 고집과 결심이 어떤지는 누구나 인정하고 있었고 그가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는 사실을

모두 다 알고 있었지만 다현의 고집불통 오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51

조금 일찍 도착한 윤후는 재인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 얼굴 표정없는 재인의 심정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되었다.

윤후는 분노로 차갑게 얼어붙은 재인의 눈동자를 확인하고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도 예상한 일이었지만 이제 한주그룹은 방법이 없었다.

「필요한 자료야. 어떻게 민이사가 자금을 둘러댔나 했더니 한주더구만. 예상이 맞았어.

한주가 우리가계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있어.」

윤후의 사채시장에서 대규모의 자금이 한주를 통해 민이사쪽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흐음. 한회장이 생각보다 머리가 나쁘군. SH에는 빚이 있을텐데, 이쪽으로 머리를 드미는 거 보면」

「아니지 민이사가 머리가 좋은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주를 끌여들였으니까.」

윤후가 지적했다.

「아마도 한주에서는 네가 발을 뺀 상황이니까 민이사쪽에 점수를 줄 수 있어...그래 다현씨는 좀 괜찮아.」

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정확하게 몰라. 알려줄 생각도 없고」

「기억이 없는 거야?」

「학교 나오다 검은 차를 만난 것밖에는. 빈혈로 쓰러진걸로 둘러대고 있어.」

재인이 보기에 다현은 대충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할 뻔했는지는 짐작은 하고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워낙 보통 사람에겐 있을 수 없는 엄청난 일이라 긴가민가해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 셈이냐?」

「정식으로 할 생각이야. 그래서 먼저 와달라고 했어.」

재인이 회의실 한쪽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수고스럽더라도 네가 한주 한회장한테 전해.」

「뭐?」

「이번에 당신 딸내미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재인이 뭘할건지, 앞으로 한주가 어떻게 될건지 알리라구.」

재인이 이를 앙다물고 이야기했다. 생각할수록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정식으로 하겠다구 알리라구. 열심히 한번 막아보라구.」

윤후는 한주의 한회장에게 빚이 있다.

재인의 속셈을 한주에 알리는 그것만으로도 한주의 빚은 청산하게 될 것이다.

지금 그의 친구는 이 기회에 그의 빚까지 청산할 속셈이다.

「정식으로 하면 피곤해질거야. 그렇게까지 안해도 되. 내 빚은 언젠가 갚게 될 일이야. 」

「그 언젠가가 바로 지금이야.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아마 앞으로 빚 갚을 일이 없어질테니까 지금 하라구.」

친구는 자신의 일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윤후는 속지 않았다.

재인은 그의 빚을 자신의 빚처럼 떠안고 있었던 것이다. 윤후와 재인은 또다른 이름의 가족이었으므로.

「제발로 걸어들어 왔어. 두고 보라구. 뒤에서 치면 두고두고 날 나쁜 놈 만들겠지.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럴 가치도 없어. 김비서 조금 있다 오겠지만 한주 지금 쉬원찮아.

그래서 백화점쪽에 눈독들이는 거구. 뭘해서 그 지경까지 갔는지는 김비서 와봐야 알겠지만.」

재인이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오늘 가 봐. 그 노인네한테. 자식교육 잘못 시킨 죄가 어떤 건지 자세하게 일러주라고.」

「완전히 없애기로 결정한거니?」

「아직 확실한 것 김비서 와봐야 결정되겠지. 멀쩡한 회사를 오너의 딸 때문에 없애버린다면 이빨도 안맥히겠지만 그것도 방법이 있을테구. 할아버지랑 내가

대충 기업윤리 어쩌구 하면서 눈감아준다고 해도 한주쪽에서 보면 두고두고 오늘 일 잊지 않겠지」

재인은 솔직히 이야기 했다. 물론 재인으로서는 대충 넘어갈 생각도 눈감아줄 생각도 전혀 없다.

다만 그의 손이 아니더라도 넘어갈 기업이라면 굳이 원수소리 들으면 악역을 맡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와서 한주가 무리하게 투자한 백화점쪽 지분을 정리하려 든다면 백화점과 그 와중에 한주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테고

한주의 자금이 회수되면 백화점의 주식도 바닥을 칠 것이다.

그리고 아무 소득도 없이 자금만 쏟아부은 한주에게 채권단이 가만히 있을 리도 만무하고.

틀림없이 한주는 무모한 결정을 했고 그런 무모함 뒤에는 경영의 부실이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인은 터득하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단물만 빨아들인 다음 손을 턴 후에 시장에 내놓으면 알아서 처리될 일이다. 이 시장터엔 널린 게 기업사냥꾼이다.

재인이 맘만 먹으면 자금에 목말라 있는 한주의  채권을 손에 넣는 것은 식은 죽먹기이다.

한주쪽에서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도록 재인은 가장 교묘하고 확실하게 한주를 몰아붙일 셈이다. 그리고 이 기회에 SH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음흉한 고모부도 정리되리라.

누군가 주식손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테고 그 사람은 민이사가 될 것이다.

그도 저도 아니고 밑에 사람 건드리는 것으로 끝내려고 한다면 대주주중의 한 사람이기도 한 재인이 태하의 손을 들어주게 될 것이다.

아마  민이사 입장에선 아들이 어느새 고양이에서 호랑이로 성장한 걸 몸으로 실감하겠지만 그때는 이미 게임오버인 셈이다.

윤후는 재인의 속셈에 쓴 웃음을 지었다. 재인이 절대 그냥 넘어갈 인물이 아니다.

「거기다 내 문제만이 아니야. 내 손에서 해결되도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아」

「무슨 뜻이야.」

「나도 쉽게 넘어갈 생각없지만 다현이 오빠는 더 펄펄 뛰고 있어. 대충 넘어가면 가만 안 있을 사람이야.」

윤후는 재인보다 더 무시무시한 요구를 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못했지만 김비서와 재인의 측근들 회의에 찬바람을 일으키고 앉아있는

다현의 오빠를 보고 재인의 말을 이해했다.

다현의 얼굴과는 달리 웬만한 모델이나 배우는 얼굴도 못내밀 정도의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는 그가 굳어진 얼굴로 오가는 대화를 냉정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재인이 불뿜는 용이라면 다현의 오빠는 절대 잠들지 않는 차가운 용이었다.

다현의 오빠인 김서현이 얼굴표정이 약간이나마 변한 것은 재인이 회사로 돌아간다는 선언을 할 때 뿐이었다.

그것도 약간 미간이 좁혀졌을 뿐 저 젊은 의사는 재인만큼 포커페이스였다.

「이대로 결정하는 겁니다.」 재인이 마지막으로 결정했다.

「민태하. 앞으로는 네 몫이다. 백화점쪽은 완전히 사수하라구.」

태하는 기분나쁜 표정을 짓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일은 알아서 할테니 친애하는 사촌 형께서나 잘하라구.」

「법적조치는 어떻게 할텐데?」 서현이 물고 늘어졌다.

「대응할 기회를 주고 해도 늦지 않아. 그리고 쉽게 법적대응문제로 일을 마무리하면 개인문제로 한 그룹을 도산시켜 버린 꼴이 된단 말이야.

그럼 우리가 여론에 몰려. 무너지고 나서 해도 절대 안 늦어.」

「자네가 안하면 내가 해. 난 내 동생을 건드린 놈들이 그냥 발 뻗구 자는 꼴은 못본다구.」

「이번 일만으로도 절대 발 뻗고 자지는 못할 겁니다.」

친구가 엄청나게 몰리는 꼴을 막아보고 싶은 윤후가 중간에 개입했다.

「그리고 언론에 공개되면 다현씨도 같이 고생할 거구요.」

서현은 고개를 돌려 윤후를 주시했다.

이 남자의 역할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선량해 보이는 그의 얼굴이 결코 그의 모든 것이라고는 생각할 만큼 서현은 순진하지 않았다.

「내 동생은 내가 보호합니다. 그게 언론이든, 세상이든간에. 누구처럼 이 지경까지는 안 만듭니다.」

서현이 재인을 노려보며 얘기했고 서현의 날카로운 공격에 재인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자신만의 개성을 지닌 세명의 매력적인 사내들을 바라보는 유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사한 사람들이다.

'아주 괜찮은 눈요기를 했군.'

자신의 실장이나 박윤후도 강력한 카리스마를 내뿜고 있었지만 특히 저 남자는 진짜 잘생겼다.

거의 180센티미터를 넘을 듯한 키에 깍아 놓은 듯한 조각같은 얼굴은 유경이 살아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할 정도의 잘생긴 남자였다.

물론 창가에서 느긋하게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짙은 머리에 짙은 눈동자를 한 저 위험하게 생긴 남자도 아주 근사하다.

오늘은 그래도 저 고약한 실장 밑에서 일한 보람이 있다.

유경은 주섬주섬 회의실을 정리하면서 생각했다.

52

「그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그럴리 없어.」

놀란 주희가 펄펄 뛰었다.

「너 미쳤구나. 재인오빠를 그렇게 몰라....감히 어떻게 그런 짓을...」

윤서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녀는 어제 밤늦게 윤후로부터 주희와 거리를 두라는 경고를 받았다.

윤서는 주희가 저지른 일에 기가 막혔다. 제정신이 아니라면 몰라도 재인을 건드리다니.

「그 병신 같은 자식이 내가 문앞까지 데려다 줬는데 굴러 들어온 떡을 안먹는게 말이 돼 ?」

주희가 갈라진 소릴 질러댔다.

주희는 생각대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은 불만과 앞으로의 공포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 바보야. 그 민태하라는 사람도 재인 오빠 집안이라구. 그 사람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인 줄 알아.」

「그래도 그 사람 아버지랑 우리 아빠랑 일을 같이 하고 있단 말야. 그 사람 그리고 나하고 약속했단 말야.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구.」

주희가 비명을 질렀다.

「상대를 가려보며 찔러야지, 민태하라는 사람도 닳고 닳은 사람이라구. 그런 사람도 감히 재인 오빨 적으로 돌리지 못해. 근데 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나한테 고맙다구 그랬단 말야. 좋은 기회라구.」

윤서가 보기엔 뻔한 일이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고이 여자를 돌려주고 이득을 챙기는게 훨씬 나은 장사이리라.

그에겐 정말 좋은 기회리라.

민태하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재인이 선택한 여자를 건드릴 이유가 없다.

막대한 재산이 손아귀에 굴러 떨어진다고 해도 어차피 재인은 그가 가진 주식과 경영능력만으로도 충분히 이사회를 장악할 인물이다.

아니더라도 자신의 빚을 절대 잊지 않는 재인과의 싸움은 보지 않아도 힘겨울테고.

물론 일이 잘된다 해도 그의 할아버지 성격도 만만치 않은지라 유언장이라는 게 언제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 똑똑한 민태하가 굳이 이재인을 적으로 돌려가면서 그와 원수될 이유가 없다.

아무리 사이 안 좋은 사촌이라도 그 사람도 그 집안 사람이다.

우선 사촌이 선택한 여자를 아내로 삼을 만큼 태하가 상식이하라는 생각은 들지도 않는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까.

윤서네 집안은 주희네에게 빚이 있다.

사실 처음엔 그 빚 때문에 가까워진 윤서와 주희였다.

건방지고 버릇없고 그리고 제멋대로인 주희이기는 해도 윤서는 철없는 주희를 막내동생처럼 싸고 돌았었다. 주희가 저지르고 다니는 일을

사려깊고 이성적인 윤서가 매꾸기 일수였다.

윤서가 빚을 갚을 방법은 그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서는 이제는 주희를 도와 줄 수 없었다.

「나도 이 일만은 도와 줄 수가 없어」

「싫어, 살려줘 윤서야」

급기야 주희가 울음을 터뜨렸다.

「오빠가 경고하고 나섰어. 앞으로 네 일에 관여하지 말래.」

「그럴 수 없어. 어떻게 네가 내게 이럴 수 있어 ?. 」

주희가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윤서로서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미안하다. 넌 상대를 잘못 골랐어.」

윤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윤후의 방문을 받은 한회장은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윤후는 자신의 빚 때문에 왔노라고 확실히 하고 자신의 딸인 주희가 벌인 어마어마한 짓을 이야기했다.

「그...아이가...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

「일이 어렵게 됬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도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SH만 아니더라도 제가 뛰어다녔겠지만 ... 지금 상황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으..음, 어쩌면 좋겠나 ?」

한회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현재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재인이라는 사람.」

「방법이 전혀 없겠나?」

「뭣 때문에 백화점을 건드리셨습니까? 그것만 아니더라도 주희선에서 끝낼 수 있었을텐데.」

윤후는 안타깝다는 듯 말했지만 한회장이 왜 백화점에 뛰어들었는지 잘 알고 있다.

요는 현금을 손에 쥐고 싶었던 것이고 동창인 민이사의 강력한 꼬드김이 있었으리라.

거기다 '대 SH'를 질러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그는 화장품 장사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야심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상대를 잘못 골랐다.

「난SH가 민이사 소유라 생각했네.」

물론 이 말은 윤후도 한회장도 거짓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는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고 누울 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발을 뻗었으리라.

「그랬으면 민이사님이 한주를 끌어들이지 않았겠지요.」

윤후는 냉정하게 집고 넘어갔다.

한회장은 등뒤에 식음땀이 솟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일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재인의 성격이 어떻다는 건 재계의 누구나가 아는 일이다.

「윤후, 빚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한번만 생각해주게. 자네는 김실장과 친하지 않은가? 부탁이네. 이번 일을 해결해주면 내 평생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하겠네.」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재인도 재인이지만 그 아가씨의 오빠가 더 펄펄 뜁니다. 이대로 일을 마무리지었다가는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윤후는 서현의 차가운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 아가씨 오빠 정도야 내가 막을 수 있을걸세」

한 회장은 보퉁 집안의 평범한 남매정도는 해결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건 서현을 잘못 판단한 일이다.

서현을 직접 눈을 봤다면 그런 말을 쉽게 하지 못했으리라. 한회장의 오만한 발언에 윤후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재인이도 그 사람 제압하지 못했어요. 만만한 사람 아닙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법으로 해결하길 원합니다.

납치가 범죄라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그렇게 되면 한주그룹이 설사 살아난다 하더라도 여론의 비난을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그 정도는 내가 해결할 수 있네.」

한회장은 다급했다. 여론악화쯤이야 회사주식에 영향을 끼치겠지만 그일로 회사가 망하지는 않을테다.

그리고 여론에 새기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건을 마무리할 자신이 그에겐 있었다.

그가 그동안 그쪽으로 찔러 놓은 돈이 얼마던가.

「다현씨, 그 아가씨 작은 아버지가 서울지검 부장검사입니다. 아무리 회장님이 연줄이 확실하다고 하셔도 그 아가씨 작은아버지까지 막을 순 없을 겁니다.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하고 차기 검찰청장으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타협같은 것 절대 안하실 겁니다. 조카가 납치됬다는데 그분이 가만 계시겠습니까? 」

「그래도 회사가 망하는 것보다는 낫네. 해볼 가치가 있어.」

「시작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절대 그럴 리도 없겠지만 설사 그 검사가 뒤로 물러서더라도 회장님이 가만 있지 않으실테니까요.」

「그게 무슨 뜻인가? 회장님이라니?」

「이규철 회장님 말씀입니다. 윤회장님 말씀대로 다현씨네 집안 평범합니다. 그런 다현씨가 어떻게 재인이를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윤회장은 아무말도 못했다.

「김다현씨는 이규철회장님이 직접 고르신 SH의 상속녀입니다. 재인이보다 먼저 선택한 그집 며느리라는 말씀입니다.」

윤후가 쐐기를 박았다. 윤후는 윤회장의 무너지는 모습에 동정의 마음을 느꼈다.

재인의 말대로 그는 윤회장에게 빚이 있고 그 빚을 갚아야 했다.

「일단 주희를 보내세요. 정식으로 사과하도록.」

「누구한테? 이 실장은 그 앨 죽일거야.」

아무리 지금 자신이 죽이고 싶은 딸이지만 그렇다고 그앨 호랑이굴로 보낼 수는 없다.

「다현씨한테 보내세요.  손이 발이 되도록 빌라고 하십시오. 다현씨는 어쩌면 이해할 지도 몰라요.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회장님이나 재인이를 설득시킬 수 있는 사람은 다현씨 뿐입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윤후가 일어섰다.

「고맙네. 자네 빚은 이걸로 청산됐네.」

윤회장이 비틀비틀 일어섰다.

윤후는 그동안 어깨를 짊어지고 있는 그의 짐으로부터 홀가분하진 느낌이었고 이 중년의 기업가에게 연민이 생겼다.

하지만 정말 여기까지가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이다.

「고맙습니다.」

윤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53

윤후는 주희가 다현을 만날 때 동행하기를 자청했다.

지금 한주희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제한적이었고 악에 받친 한주희가 또다시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의외로 한사장이 함께 가겠노라고 따라 나섰다.

다현은 점차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재인은 저녁때 자신이 집에까지 데려다 준다며 그녀를 방안에서 꼼짝 못하고 누워있게 했고 그의 오빠도 재인의 그런 결정에 찬성을 표했다.

빈혈이라구. 생전 그런 일 없었던 다현이다. 다현은 코웃음을 쳤다.

뭔가가 있는게 확실한데 재인도 그의 오빠도 입을 열려고 들지 않는다.

무언가 입을 막았고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그 상황이 보통 상황은 아니란 걸 다현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눈치 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두 남자는 지금 다현이 바보이길 바라는 모양이다.

'빈혈이라니. 전문의 정도 된 사람 머리에서 그 정도밖에 안나오나. 창의력이 부족하군.'

현관벨이 울리자 다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시간에 재인이 집에 없으리란 걸 알텐데 누구일까.

「저... 윤후입니다. 다현씨.」 화면에 윤후의 얼굴이 비쳤다.

「어, 왠일이세요?.  잠깐만요」

대충 입고 있는 옷을 훑어본 다음 다현이 문을 열자 윤후와 머리가 희끗거리기 시작한 중년의 남자와 파티에서 설전을 벌였던 한주희가 있었다.

난데없는 방문에 다현의 눈동자가 커졌다.

「몸은 괜찮아요? 다현씨」

윤후가 재빨리 다현의 얼굴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다현을 고개를 끄덕여 질문에 답하고 낯선 방문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음, 한주희씨는 저번에 봤지요? 」

「네.」

하지만 그날 봤던 한주희의 당당하고 오만한 태도는 온데간데 없고 하얗게 질려서 어쩔줄 몰라하는 낯선 모습의 신경질적인 여자가 서있을 뿐이다.

「이분은 한주희씨 아버님이신 한주그룹 한태호 회장님이십니다.」

「네...」

다현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려고 하자마자 그 중년의 회장님은 갑자기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황당스러운 일에 다현이 어쩔줄 몰라하자 주희도 다현 앞에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다.

「이게..무슨..아니, 어서 일어나세요? 이런 이게 무슨 일로...」

다현은 당황해서 한회장을 열심히 끌어당겼지만 한회장은 현관 앞에 무릎을 꿇고 일어나질 않았다.

그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 뿐이었다.

「잘못했어요. 전 일이 이렇게 크게 되리란 생각 안했어요. 」

주희가 울음을 터뜨렸다.

「이게 무슨 일에요?. 윤후씨.」

다현은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윤후는 짐작하리라 생각했다.

「일단 앉지요. 한회장님.」

윤후는 주희는 쳐다보지도 않고 한회장을 끌어다 의자에 앉혔다.

한회장은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윤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들은 다현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윤후를 지켜봤다.

「일이 그렇게 된 거군요. 그럼. 재인씨는 어떻게 한데요?」

「가만 안있겠다고 펄펄 뛰고 있지요.」

「우리 오빠도 알고 있을텐데... 재인씨보다 더 하면 더했지 가만 있을 사람이 아닌데..」

다현이 혼자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픽 거리고 웃음을 날렸다.

「우리 오빠가 재인씨 살려 뒀어요?」

「네?」

「울 오빠 성격에 아마 다른 사람보다 재인씰 달달 볶았을텐데. 뭘루 꼬셨을까.」

다현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직도 달달 볶이고 있습니다.」

다현의 표현에 윤후가 얼핏 웃음을 참으려 했다.

「아마 아직 시작도 안 할걸 걸요. 그래서 제가 이분들에게 뭘 해드리면 될까요?」

다현은 한회장과 훌쩍이고 있는 주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저 용서해주십시오. 일이 더 크게 되는 일만 막아주시면...」

「재인씨도 오빠도 만만한 사람들 아니에요. 제 말 듣는 사람들도 아니고...」

다현은 한숨을 쉬었다.

「쉽지 않은 사람들을 건드리셨네요.」

「그래도 지금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다현씨 뿐입니다.」

윤후가 한회장을 대신해서 말했다.

「그나저나 윤후씨가 여기 온 걸 재인씨도 알아요?.」

다현히 갑자기 윤후를 보고 이야기를 바꿨다. 물론 재인은 알고 있다.

하지만 윤후는 웬지 다현의 뉘앙스에 부정의 대답을 원하는 걸 느낄 수 있었고 또한 갑작스러운 대화 변화에 당황해서 말끝을 흐렸다.

「...그게..」

「당연히 모르겠지요.」

다현은 윤후의 어정쩡한 답변을 부정으로 몰아붙이고 만족스러워했다.

「어쩌려고 그러세요?. 재인씨가 알면 윤후씨한테도 길길이 뛸텐데.」

「어...그건... 」

윤후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다현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한회장님이 윤후씨한테 엄청 큰 빚을 지셨네요.」

다현은 이제 윤후에게서 시선을 돌려 한회장을 향했다.

그건 질문도 아니었고 단호한 확정판결이었다.

그녀의 대답에 한회장은 얼른 인정했다.

「물론이오. 윤후씨한테 큰 빚을 졌소.」

한화장은 정중하게 윤후에게 고개를 숙였고 윤후는 또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윤후씨. 방법이 있어요?」

「글쎄 모르겠습니다. 다현씨가 일단 주희 행동을 용서한다고 재인일 달래야겠지요.」

그렇다고 그 녀석이 순순히 말을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음... 」

다현은 계속해서 훌쩍거리고 있는 주희를 살펴봤다.

「용서라. 그러지요.」

다현은 조용한 목소리 말했다.

「아, 고맙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한회장과 주희는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저도 한주희씨가 제게 한 일 잊지는 않겠어요. 」

다현은 주희를 바라보며 그녀의 오빠를 닮은 예의 차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회장이 나가고 난 후 윤후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재인이가 제 빚에 대해서 얘기했습니까?」

「빚이요? 아니요. 돈 필요하세요?」

다현이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운후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런 빚이 아니구요. 아까 한회장을 은근히 몰아붙이셔서요.」

「제가 뭘 했는데요. 그 나이드신 양반을 몰아댔나요?」

「제게 빚을 졌다고 선언하시지 않았습니까?」

「아하. 그일」

다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일에 대해서 궁금해서요. 뭘 알고 그러신가...」

「아뇨.」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윤후씨. 아마 한회장님이랑 엄청 친한 거 아니었음 절대 이 자리에 그 사람들 데리고 나타나지 않았을 거잖하요.

그 집 딸내미 고약한 성격 보건대 절대 친할 것 같진 않고. 」

다현이 미소 비슷한 걸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재인씨가 절대 모르지 않을테구요. 그 사람이 얼마나 약았는데.」

다현은 재인이 얘길 하면서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윤후를 향해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후씨가 여기 나타난 걸 보면 뭔가 있는 거구 재인씨랑 뭔가 결정할거면 전 대충 그걸 챙긴 것뿐이에요.」

김다현. 순진하게 생긴 ... 이 여자... 보기보다 엄청 똑똑하다.

그 짧은 순간에 능구렁이 한회장도 읽어내지 못한 숨겨진 사실들은 숨은그림을 찾아내듯이 조각을 맞추어 내었다. 그리고 그림이 맞춰지자마자 선언하듯이

한회장에 빚을 주어버렸다.

윤후는 다현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녀는 재인이, 아니 이 회장이 선택한 여자였다.

「그럼 다현씨한테 제가 빚을 진 셈이 되나요.」

「아니지요. 어차피 재인씨 음흉한 머릿속에서 나온 걸테구 재인씨랑 윤후씨는 한식구잖아요. 빚이란 게 있을 수가 없지요.」

다현이 조용히 미소지었다.

54

재인이 집에 도착하자 다현이 그를 반겼다.

「어서 와요. 배고파 죽겠어요. 」

「하여튼 우린 맨날 먹는 얘기 빼면 할게 없어. 」

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현이 그를 반기는 게 좋다.

서현이 부득부득 다현을 집에  데리고 가겠다고 우기는 것을 겨우 진정시켰다.

벌써 다현에겐 그녀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이 붙어 있지만 재인은 이제야 자신의 집안에 들여앉힌 다현을 서현이 도로 데려가는게 싫었다.

아무리 봐도 다현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은 이곳 자신의 집이다. 그의 곁에.

그런데 오늘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그는 싫었다.

하지만 서현은 아직 그에 대한 감정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예의 그 잘생긴 얼굴을 찌푸리며 다현을 당장 데려가야겠단다. 젠장 밥은 먹여 보내야지

아무래도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해야겠다.

「집에 라면도 없어요. 그리고 당신이 꼼짝말고 누워 있으라고 한 덕분에 아무것도 못했어요. 」

그녀가 약간은 미안한 듯 변명하듯이 말했다.

「아니면 할 줄은 알고 ?.」

「아무리 그래도 라면도 못 끓일까」

재인이 놀리자 그녀가 짐짓 심통난 표정을 해보였다.

「밥먹게 옷 갈아 입고 와.」

재인이 손에 들고 있는 봉투를 내밀었다.

「나가서 사먹게요? 그냥 여기서 대충 먹어요. 」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흘긋 바라봤다.

재인의 티셔츠와 반바지를 대충 끼어입은 다현의 모습은 귀여웠다.

「옷부터 갈아 입으시라구요.」

다현이 씻고 재인이 준비한 - 지나치게 엄격한 정장도 아니고 마구 입을 수 있게 풀어지지도 않은 살구빛 원피스 -

옷을 입고 나오자 재인도 가벼운 캐쥬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배고파?」

「그럼요. 」

그러면서도 다현은 거실안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저 사람들 뭐에요 ?.」

「응. 저녁식사 차리잖아.」

재인은 다현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머리에 흰 모자를 높이 쓴 점잖은 아저씨가 그녀를 보며 정중하게 의자를 빼주고 싱긋 웃었다.

「이게 뭐에요?」

다현의 눈은 아직도 놀라움으로 가득찼다.

「우리 호텔에 부탁했어.」

「이거 직권남용 아니에요 ?. 저 바쁜 사람들을 이 시간에 여기까지...」

「직권남용 아니야. 내가 출장 서비스 부탁했다구. 먹자.」

다현이 눈을 굴렸다. 호텔에서 밥먹기도 어려운데 호텔사람들을 여기까지 불러서 음식을 차려.

「먹어. 나가기도 싫고, 그렇다구 당신 아픈데 대충 먹이기도 싫었어. 그러니까 많이 먹어」

「안아파요. 빈혈이래매요 ?」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도 음식을 시켜서 먹는구나. 난 짜장면만 배달해주는 줄 알았는데

「당신 취향대로니까 어서 먹어」

「내 취향이 어떤데요 ?」

「부드러운 옥수수 스프, 피한방울 안나오는 스테이크, 치즈케익, 호두아이스크림, 모카커피.」

그가 그녀 앞으로 접시를 놔주며 줄줄이 외웠다.

「아, 찬물까지.」

「호텔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이렇게 음식이 다 지금한 것 같은 거에요 ? 」

그녀가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자 재인이 한숨을 쉬었다.

「호텔 기밀사항이야. 나중에 결혼하고 나면 가르쳐줄게」

재인은 그녀를 위해 붉은 포도주를 따라주면서 말했다.

「치.」

그녀는 입을 비쭉거리면서도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이 좋았다.

「야회연회를 위해서 음식할 수 있는 조리용 차가 따로 있어. 프랑스에서 엄청난 가격으로 주문제작한 거야.」

「으응 그렇구나. 그럼 여기까지 오면서 음식을 해요 ?」

「여기서도 하고.」

「우... 배불러서 꼼짝도 못하겠어요.」

「커피는 저쪽에서 마시자. 」

배부르다고 숨을 몰아쉬는 다현을 재인이 킥킥거리며 일으켜 세웠다.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진 넓은 거실에서 그는 다현을 한쪽 어깨로 안고 커피를 들었다.

「난 왜 헤이즐넛보다 모카 냄새가 더 좋을까 ?」

「그야 당신이 특이하니까 그렇지」

특이하다. 그녀는 그 소리가 싫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헤이즐넛은 화장품 냄새 난단 말야. 취향이지 뭐」

「그래. 근데 그 취향이 나한테도 옮은 모양이야. 나도 요샌 모카가 좋아」

재인은 다현의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당신한테 나는 향기는 더 좋구 」

「나도 당신 냄새가 맘에 들어요.」

다현은 그의 품안에 안기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당신을 이렇게 옆에서 안고 있으니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재인이 심음 비슷하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이렇게 온전히 나의 품안에 있다. 그는 그 사실이 행복하다.

「누군 그런 줄 알아요 ?.」

「그거 다행이군, 나만 정신 없는게 아니니까.」

부드러운 손길과 친밀한 호흡은 다현을 안심시키고 흥분시켰으며 재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게 했다. 그녀는 어느새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 근육을 쓸어가고 있었다.

섬세하고 작은 다현의 손이 단단한 재인의 근육 위에서 움직이자 재인은 헉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다현은 자신이 불러일으키는 관능적인 반응에 여성으로서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그녀가 쿡쿡거리자 재인이 신음소리 비슷하게 중얼거렸다.

「좋기도 하겠군... 이것 봐. 이건 웃을 일이.... 아니야... 이제 ... 그만」

재인은 다현에게 그만두라고 말은 하긴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에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둘은 어느새 소파에 길게 몸을 누이고 있었다

심장은 미칠 것처럼 쿵쿵거렸고 미칠 것 같은 흥분이 온몸을 타고 내렸다.

다현만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섬세하고 우아한 손길에 재인은 거의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랐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헉헉대는 그의 심장을 제자리에 돌려 놓기에는 재인도 너무 버거웠다.

다현을 맘껏 탐닉하고 사랑하고 소유하고 싶었다.

오늘 이 밤 그녀를 그의 것을 만들고 싶었다.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오직 나만의 사람으로. 그는 절실하게 그녀를 원했다.

나란히 몸이 겹쳐지고 그녀의 부드러운 엉덩이가 그의 단단한 허벅지에 와닿았다.

그들은 조금씩 서로를 음미했다.

「으음... 너무 좋다.」

재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멈추고 싶지 않아. 오늘은.」

다현은 새빨개진 얼굴을 돌렸다.

「이대로 끝까지 갈거야. 」

재인은 다현의 얼굴을 돌려 눈을 맞췄다.

「우리 할아버지가 유산에서 빼버려도 좋고 당신 오빠가 메스를 들고 덤벼도 상관없어. 오늘은 완전하게 사랑할거야. 」

55

다현은 자제력을 발휘하느라 잔뜩 긴장하고 그녀의 허락을 구하고 있는 재인을 바라봤다.

이 남자... 의식을 잃는 그 순간조차도 그녀를 지배했던... 내게 없어서는 안될 사람

내기 사랑하는 남자.

다현이 아주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

만일 다현이 싫다고 했으면 멈출 수 있는 힘이 이미 재인에겐 없었다.

다현을 안아들고 침실로 옮기는 재인의 눈빛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뜨거워졌다

침대에 다현을 내려놓은 재인은 다현의 손가락에 짧고 다정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혀가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머리카락, 이마, 볼,

그리고 그녀의 입안 깊은 곳까지 섬세하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거칠면서도 숨김없이 욕망을 드러내는 그런 키스가 이어졌다.

이제 그의 입술이 귀 뒤쪽의 예민한 곳을 애무하자 다현이 조그맣게 탄성을 질렀다. 그의 체중이 서서히 다현에게 실렸고 재인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왔다.

그의 거친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던 입술이 가슴에 닿았다. 작지만 탄탄한 가슴이 하얗게 눈앞에서 그를 유혹했다.

「재인씨! 」

가슴을 움켜쥐는 그의 손길에 다현이 숨을 들이켰고  재인은 참을 수 없는 유혹에 그녀의 가슴을 입안에 품었다. 재인은 맘속으로 천천히를 외쳤지만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한 그의 몸은 본능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재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거칠게 입술을 덮으며 다현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재인이 다현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녀는 두려운 듯 다리를 오므리며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괜찮아. 사랑해. 다현아.」

재인이 약간은 겁에 질리고 조금은 긴장한 다현의 눈을 마주치고 약속했다.

「날 믿어.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린 하나라구. 언제나 지금처럼 당신 옆에 있을 거야.」

다현이 조그맣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현이 조금 몸의 긴장을 풀자 재인은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어대며 그의 몸을 다현에게 밀어넣었다.

조금씩 조금씩 재인이 그녀에게 들어왔다.

그렇게 조금씩 다현의 마지막까지 다다른 재인은 너무 작고 여린 다현의 몸 안에 완전하게 자신을 묻었다.

「... 재인씨... 」

재인의 갑작스러운 침입으로 다현이 생각지도 못한 아픔에 단단히 몸을 굳히며 작게 저항했다.

「잠깐만... 다다..」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 재인은 다현에게 깊은 키스를 퍼부어댔다.

자신의 몸 아래에서 꿈틀대며 아파하는 다현을 배려하는 그의 결심과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차지하려고 잔뜩 긴장하고 있는 그의 욕망사이에서 재인은 흔들리고 있었다.

작고 연약하고 따뜻한 다현의 몸은 흥분할 대로 흥분한 재인의 몸을 어렵게 받아들였다.

재인은 그녀 안에 머문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 안에 더 깊숙이 도달하고 그녀 안에서 맘껏 움직이고 그녀를 아주 완벽하게 채우고 싶은 욕망을

참기 위해 재인은 이를 악물었다.

다현이 움직이자 그가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움직이지 마... 그냥 있어....」

재인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가쁜 숨을 진정 시켰다.

「이제 괜찮아요.」

다현은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재인의 몸에 겨우 적응하고 있었다.

아주 낯선 느낌. 조금은 불편하고 조금은 어색한.

하지만 세상 그 어느 때보다 이재인이라는 사람을 가깝게 느낄 수 있고 아주 친밀하게 다가오는 그를 향한 사랑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손과 손이 부딪히고  가슴과 가슴이 닿고 호흡과 호흡이 함께 하는 사랑. 재인과 지금 그 사랑을 하고 있다.

다현의 말에 재인은 짧은 신음과 함께 그녀의 몸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정신없이 키스와 애무를 퍼부었다.

절정까지 올라선 재인은 짧은 탄성과 함께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었다.

「괜찮아? 」

재인은 그녀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이마에서 치워주면서 물었다.

다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괜찮은지 안그런지 잘 모르겠다.

온몸의 근육이 나른한 비명을 질렀고 몸 깊숙한 곳이 조금 아프고 쓰라렸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프다고 하면 아마 재인이 펄쩍 뛸 것 같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움직이자. 지금은 꼼짝도 못하겠어」

재인은 다현에게 어깨를 내어주고 팔을 돌려 그녀를 그의 품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였다. 땀에 젖은 두 사람의 몸이었지만 다현은 싫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그의 품안에 있는 이 순간이 편안했다. 마치 오래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얼핏 잠에서 깬 재인은 그의 품안에 얌전히 잠들어 있는 다현을 보고 미소지었다.

아주 완벽한 사랑이었다. 한번도 이렇게 만족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

내 여자라는 소유욕이 언제나 냉철했던 그의 이성을 장악했다.

재인은 다현을 위해 욕실의 물을 받으며 미소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SH 에머럴드 호텔 다이아몬드 룸에는 재인의 식구들이 흥미롭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재인과의 식사를 기다리던 다현은 갑자기 들이닥친 재인의 식구들 때문에

무척 당황했지만 그래도 그의 할아버지를 본 기억이 정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반갑게 다현을 맞았다.

「우린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이 안나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이 할아버지는 처음 본 분인데.

「생각 안날지도 모르겠네. 벌써 10개월 전이니까. 지난 5월에 인천에서 봤어.」

아무리 생각해도 나지 않는 기억을 되살려 주려는 듯  강인한 눈매와 쨍쨍한 몸놀림으로 할아버지는 그녀를 주시했다.

「5월에 어디에서 제가 뵙지요 ?」

다현의 미간이 약간 찌프려졌다.

「중요한게 아니에요. 할아버지랑 다현이 어디서 만났는지는. 」

재인이 할아버지가 있건 없건간에 상관없이 다현의 어깨에 팔을 둘러 자신의 품안의 끌어안으며 말했다.

「저희 이번 봄에 결혼합니다.」

이 사람은 꼭 이런 식으로 사람의 허를 찌른다.

「흐음. 다현이가 허락한 사항이겠지?」

할아버지의 아무렇지도 않은 질문에 재인이 속을 이를 갈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이번만큼은 재인의 편이었던 모양이다.

재인과 다현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규철은 함박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재인의 품에서 끌어내어 자신의 품안에 안았다.

「아이구. 잘했다. 축하한다. 재인아. 고맙다. 다현아.」

할아버지의 느닷없는 환영과 축하 속에서 다현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걸로 집안인사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성현그룹의 이규철이 허락한 이상 그 집안의 누구도 다현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가족들의 열렬한 환영속에서 다현이 어쩔 줄 모를 때 재인의 고모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등장했다.

수영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아버지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그 사람보고 사장자리를 내놓으라 그러셨다구요 ?.」

민이사는 어떻게든지 버티어 볼려고 했지만 한주의 자금이 철수되면서 생긴 주식폭락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떠 안아야 했다.

물론 재인과 태하의 치밀한 계획도 계획이었지만 그룹 내막에서 지시된 회장의 무언의 압력은 그로 하여금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하였다.

수영은 사실 남편 혁주에게 눈꼽만큼이라도 애정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건 집안의 파워게임에서 그녀의 세력이 줄어든 것을 의미했다.

수영은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56

백화점 개입 사실이 알려지면서 채권단과 금관위, 국세청쪽에서 은밀한 압력을 받아가며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한주화학이나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던 미술관에서조차도

내쳐지고 재계의 모든 모임과 그들이 몸담고 있는 상류사회의 공식적이거나 심지어 개인적인 행사에서조차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는

한주희의 불쌍한 사연은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재인은 주희가 한국에서 발붙일 여지를 두지 않았다.

다현의 오빠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법적인 조치를 철회했지만 재인은 절대 주희를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의 지시를 암묵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회장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재인이 녀석은 결심한다면 당연히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아이니까.'

하지만 자신의 남편과 자신의 집안까지 조카가 간섭한다는 것에 수영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소란 떨지 마. 오늘 같이 좋은 날에.」

규철이 자신의 딸내미를 보고 혀를 찼다.

「좋기도 하시겠군요. 저 애도 저 여자랑 똑같다구요.」

수영이 소리를 지르며 노려보고 있는 사람은 재인의 작은 어머니었다.

「말 조심해라.」

그가 경고했다. 아버지의 단호한 경고에 수영은 다시한번 증오의 눈빛을 보내고는 일어섰다.

그리고 다현을 향해 악귀같이 소릴 질렀다.

「결혼? 한 번 해보라구. 그게 바로 지옥일테니까. 저 아인, 이 집 재산을 위해선 뭐든지 해. 제 에미 애비도 버린 놈이라구.」

「고모 ! 」

재인의 어머니가 얼굴이 붉어지며 수영을 노려보았지만 고모라는 이름의 여자는 저주처럼 비수를 찔러대고 바람같이 나섰다.

재인의 턱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규철의 얼굴이 노여움으로 붉어졌다.

재인의 다른 식구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래도 설명을 들어야겠지 ?.」

재인이 우울하게 다현의 얼굴을 살폈다.

「뭐요 ?, 그 고몬가 하는 분이 한 말이요 ? 별루요, 네가 이상한 건 ...」

「뭐가 이상한데 ?」

「이런 유산 땜에 당신보고 결혼하라구 하신 일이 그럼 첨이 아니라면서요.」

「응. 얘기했잖아. 저번에...삼 년 전에도 그러셨다구.」

어쩔줄 몰라하며 다현에게 사과하던 재인의 식구들이 빠져나가고 난 룸에는 재인과 윤후, 다현만이 앉아 있었다.

「근데 왜 그때는 결혼을 안했는데요 ?.」

「그때는 유언장안에 재인의 작은...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 없었거든요」

윤후가 끼어들었다.

「할아버지가 유산에서 작은..어머니와 아버지 몫을 모두 고모부에게 주신다고 했거든. 재선이랑 재영이 지분은 말할 것도 없구.」

재인이 얼굴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였다.

「백화점은 원래 ...작은 ... 어머니 몫이야. 외가 재산이라구. 처음엔 물론 어머니 몫은 아니었지만... 그걸 고모한테 주고 나면 상당히 힘들어 하실걸 알고 계셨어.

할아버지가 용케 그걸 아신 거야. 두 분의 상처를 막으려면 내가 뭐든지 하리란걸. 」

그의 어머니는 백화점을 운영하던 외할아버지의 사생아였다.

그분은 비행기사고로 아들형제가 그렇게 가지 않았다면 절대 어머니를 인정하지 않으셨으리라. 백화점을 유산으로 받게 되자 그제야 어머니를 인정한 할아버지처럼

외할아버지도 똑같이 비정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한 할아버지만큼 백화점은 어머니가 지켜야 할 재산이었다. 그리고 재인이 지켜야 할.

「그럼 백화점 땜에 나랑 결혼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그녀가 비난하듯 재인을 흘겨봤다.

「아니지. 첨엔 진지한 교제였지. 백화점 아니라 SH를 몽땅 주신다고 해도 결혼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맘이 바뀐건 당신과 거래하고 나서부터였어. 」

「거래하고 나니까 내가 엄청 예뻐 보였단 말이에요.」

여전히 다현은 삐딱하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재인은 한마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재인의 단호한 긍정에 윤후는 웃음을 터뜨렸고 다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무튼간에 이 남자는 못말리겠다.

「그런데 왜 당신이 그렇게 작은 어머님이랑 아버님한테 신경쓰시는데요. 엄청 잘하시던데요. 조카임에도 불구하고.」

다현은 그게 궁금했다. 에미 에비도 버렸다고 비난받기엔 그는 너무 그의 식구들에게 잘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런 비난을 받을까 ?

「...친부모님들이시거든.」

재인이 말을 시작했다.

「난 우리 할아버지 장손이지만 처음엔 아니었어. 위에 사촌형님이 하나 있었는데 그 형은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었어. 」

윤후도 재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재인과 윤후의 어린시절의 우상이었다.

「그 형이 스물 둘에 교통사고 죽고나니까 큰아버지 큰어머니는 엄청 힘들어하셨지, 특히 어머니는 살아갈만한 희망을 잃을 만큼. 할아버지가 그때 날

큰댁으로 보내셨어. 우리 엄마...그러니 청담동 어머니 말야. 어머니를 받아주시는 조건으로. 그때까지 할아버지는 반대한 결혼을 강행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려고

들지 않으셨거든. 그래서 그날로 난 큰어머님의 아들이 됐어. 열한 살 때 평창동으로 간 후로는 거기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러. 아마 할아버지와 싸움은 그때부터였을걸.

그때부터 사사건건 간섭하고 들어오셨으니까. 」

재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엄마 - 그러니까 평창동 어머니께서 나한테 너무 잘하셔. 아마 그분이 내게 해주신 사랑을 부정하면 난 죄인이 될거야. 난 좋은 아들이 될 생각이야. 」

「그럼 당신 어머님은요? 그러니까 청담동 어머니 말이에요」

「흠. 지금은 재선이 잘하고 있지. 재영인 아직 철이 없으니까. 난 열한 살 때 이후로는 한번도 어머니라고 불러 본적이 없어. 그렇게 못부르게 시킨 할아버지 탓도 있지만

어린 맘에도 지금 엄마가 불쌍했던 모양이야. 하지만 그게 항상 맘에 걸려. 두고두고 내가 가지고 갈 죄책감이야. 아마 어머니한테도 그게 상처가 될테고.」

「그 얘길 당신 고모는 그런 식으로 얘기해요 ?」

재인의 고해를 다 듣고 난 다현이  기가막힌 듯 눈을 굴렸다.

「고모내외는 우리 엄마한테 감정이 많으신 분들이니까.  뭐 할아버지 탓도 좀 있고」

「우와 ~ 여하튼 그런 방법을 생각해 내다니 당신 할아버지 정말 엄청 머리 좋으시다」

할아버지 얘기에 의자에 앉아 발끝을 까닥거리던 다현이 감탄을 질렀다.

「뭐가 ? 할아버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맘 고생을 했는데」

재인이 인상을 쓰며 분개했다.

「그래요? 내가 보기엔 아무리 생각해도 할아버지가 아주 적절한 방법을 생각해 내신 것 같은데 당신은 왜 이렇게 분개하는데요?」

재인과 윤후과 할아버지를 편들고 있는 그녀를 비난의 눈초리로 쳐다보자 난 다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57

재인과 윤후가 할아버지를 편들고 있는 그녀를 비난의 눈초리로 쳐다보자 난 다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절한 방법이라고?.」

재인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소리쳤다.

다현이 그의 편치 못했던 성장과정을 불쌍하게 눈물까지는 아니라도 연민의 눈초리로 그의 아픔을 함께 하리라 생각했지 할아버지의 인정머리 없는 지독한 짓에

동조의 고개를 끄덕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윤후 역시 황당한 표정이었다.

「다현씨, 재인이 그때 열한 살이었요. 어머닌 몇일을 우셨다구요. 그리고 두고두고 맘 아파하시구요. 재인이 앞에서 지금도 고갤 잘 들지 못하세요 」

윤후는 그날을 기억했다. 재인이 마치 팔려가는 송아지라도 되듯이 아이를 주시하던 그 눈빛을 기억하고 있다.

「좀 그런 맘은 있으시겠지요.  어린 아들 덕에 그동안 고민거리가 다 해결됐을테니까 좀 미안은 하시겠지요. 거기다 재인씨가 더 유별나게 구니까 더 하시겠구요.」

다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태껏의 잘못이 재인에게 있다는 듯 비난의 눈초리를 돌렸다.

「내가 잘못했다구?」

다현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할아버지 방법은 기가 막힌 결정이었다구요.」

「그 기가 막힌 결정이라는 게 도대체 뭐요? 그리고 내 덕에 우리... 엄마 고민이 다 해결됐다구?」

「당신 어머니 입장에선 절대로 손해보는 게 아니었다니까요, 물론 다른 식구들한테도.」

그녀가 다시 할아버지의 손을 들어주며 딱 잘라 말했다.

「우리어머니나 다른 누구한테 이익이라는 거요?」

재인이 정말 기가 막힌 어조로 물었다.

「그럼 당신어머니 - 그러니까 청담동 친어머니 얘기부터 먼저 할까요? 」

재인이 맘대로 하라는 식으로 다현을 노려봤다.

「내 아들이 어디 가나요 ?. 호적 바뀐다고 다 키운 자식 어딜 가겠어요. 다만 잠자는 곳만 바뀐거지.

물론 그래도 떼놓구 키우기 싫었겠지만 내 아들이 그동안 쳐다봐 주지도 않던 SH그룹의 후계자가 되는 거에요. 」

그녀는 싱긋 웃었다.

「거기다 여태 인정받지 못하다가 드디어 며느리로서 이집 식구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 하는 건데. 재인씨 어머니가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지요.

물론 당신한테 미안하시겠지요. 그 나이에 떼어 놓으려면. 그렇지만 재선씨나 다른 동생들은 아주 편안하게 김씨 집안 사람이 되는 거라구요. 」

그녀가 빤히 재인을 쳐다봤다.

「그리고 재인씨 아버진 결혼 때문에 할 수 없이 해야 했던 사업에서 짐을 덜어 내신거구요 」

「무슨 말이오? 우리 아버진 그 백화점이 할아버지한테 넘어간 걸로 엄청 죄책감을 가졌었어.」

「누구에게요? 당신어머니에게요 ?, 당신 아버지 바보 아니에요. 어차피 당신이 SH후계자가 될텐데 웬 죄책감 ?. 몽땅 당신 건데.」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교수가 천직이시라면서요 ?. 하고 싶으신 일을 하시니까 엄청 좋아하셨을 텐데요. 그리고 드디어 아버지한테 인정받을 무언가를 제공했으니까 맘 편하실테구」

다현이 읊어대는 사실에 윤후와 재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방향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계속해 보라구.」

재인은 그 다음이 궁금했다.

「당신의 큰 어머니는 그래도 의지할 만한 아들이 생긴 거구요. 그리고 후계자의 정식 어머니가 되기도 한거니까 여전히 당신의 큰 어머니는 SH의 실세구요,

계속해서 이 집안 사람인거지요. 쉽게 말하면 소속감이 생기는 거 라구요. 물론 깍듯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당신도 조금은 맘에 드셨겠지만요.」

그녀가 재인을 보고 다시 미소 지었다.

「당신에겐 ...  어머니가 또 한 분 생긴 거지요. 당신 큰어머니가 당신을 아들로 인정하는 이상 당신에겐 막강한 외가가 생기면서 당당하게 후계자가 되는 거지요.

그리고 당신 할아버지한텐...」

그녀가 거기서 빙그레 웃으며 말을 멈추었다.

「얘기해 보라구, 우리 할아버지한텐 뭐가 이익이 남나.」

「뻔하지요. SH 재산이 딴 데로 세질 않잖아요. 당신 큰 아버님이 후계자였다면서요. 그러니 그 양반은 어느 정도 SH지분을 갖고 계셨을테구 돌아가신 다음에는

당연히 큰 어머님이 상속 받으셨겠지요. 근데 당신이 양아들이 되면 큰 어머님이 혹시라도 딴데 맘먹을 일 없을테구 그렇더라도 법적아들인 당신이 있으니까

재산이 샐 일이 없지요. 」

다현은 재인이 한번도 생각해내지 않은 사실들을 읊어댔다.

「거기다가 할아버진 아들내외를 인정해줄 수 있는 합리적인 구실을 찾아낸 거구. 물론 다시 한 번 냉열한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구요.」

그녀가 말을 마치면서 재인과 윤후를 살폈다.

「두루두루 다 좋은 방법이지요. 기가 막힌 방법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그녀는 여태 그런 것도 몰랐냐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오빠나 할아버지가 말한 것보다 훨씬 특별했다. 그보다 한수 위였다.

'이런, 그녀는 그저 평범하게 애들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다현의 이런 면을 꿰뚫어 보신 걸까.'

「왜 할아버진 여태 그런 얘길 안하신거지 ?」

「그거야 그러면 그분의 인상이 흐려지잖아요. 악역 맡으시는 걸 상당히 즐기시는 모양인데」

58

서현의 도움으로 강제로 다현의 집을 밀고 들어와 집안인사까지 마친 재인은 다다가 당연히 얌전하게 결혼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현은 아니었다. 재인이 몇 일을 아무리 꼬셔대고 얼러대고 윽박지르고 볶아대도 미적미적 결혼을 피하려고 만 했다.

「내기 싫은거야?. 응? 그런 거냐구? 싫으면 싫다구 말을 하라구.」

드디어는 재인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아니라는거 알잖아요. 굳이 왜 결혼할려고 하냐구요, 그냥 우리 둘이 친구처럼...」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도 마. 난 여자 친구 필요 없다고, 난 아내가 필요해」

재인이 중간에서 말을 자르고 다다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말을 하라고. 왜 굳이 결혼은 싫다고 하는지」

「그게...」

다현이 재인의 눈을 피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럼 안되지, 아가씨.」

재인은 다현의 얼굴을 다시 자기 쪽으로 돌려놨다.

「오늘은 대답을 들어야겠어. 난 당신이랑 다른 집에서 다른 침대에서 일어나는 아침에 질렸어」

「여태 혼자도 잘 살았잖아요.」

「그래서 앞으로는 당신과 둘이 잘 살겠다구. 자 얘기 해보라구. 왜 죽어도 결혼만은 못하겠는 건지」

「그럼 둘이 그냥 같이 살아요. 한 번 살아보고 그때 결정해요」

다현의 느닷없는 제안에 기가 막혀진 재인이 눈동자를 굴렸다.

「결혼은 안하시고 그냥 둘이 살자구?. 이봐, 그건 몹쓸 남자들이 순진한 여자들 꼬셔낼 때 하는 얘기야. 다다랑 나처럼 진지한 교제를 하는 사람은 그런 소릴 안한다구.」

다다가 고개를 숙이고 머뭇거리자 재인이 한숨을 쉬었다.

「아니에요. 요새는 딴 사람들도...」

「그건 그야말로 요새 딴 사람들 얘기구. 난 아냐. 싫어. 절대루. 」

재인은 확실하게 고개를 저으며 아주 못마땅하다는 듯이 그녀를 흘겨봤다.

「그리고 그랬다가는 난 당신 오빠 손에 쥐도 새도 모르게 어떻게 될거야. 당신오빠 그렇게 몰라?. 아님 다다 작은아버님이 날 혼인빙자 간음죄로 쳐 넣으시겠지.

그랬음 좋겠어?.」

다다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의 오빠나 작은 아버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다.

「말해 보라구. 왜 결혼만은 못하겠는지. 나 모르는 과거 있어?」

재인은 고개숙인 다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런게 있을 턱이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재인이 더 잘 알고 있다.

「후~ 좋아, 과거도 좋구 남자도 다 용서할테니까 지금 남자 있다고나 얘기나 하지 마. 안그럼 그 자식 패죽일테니까.」

재인이 부루퉁한 얼굴로 단언했다. 소유욕이라면 둘째라도 서러워할 재인이 많이 양보하고 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음...난요...당신이...」

그래서?」

재인은 인내심있게 기다렸다.

「내가 뭘?」

「아마..... 재인씨 나랑 살다보면.... 나한테 질릴 거에요. 」

다현이 재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럴 것 같으면 애초에 결혼하자구도 안 그랬지. 나 바보 아냐」

재인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나도 그래요」

「알아. 다다 똑똑한거」

「난 똑똑한 것 이상이에요.」

「그것도 알아. 당신 머리가 거의 아이슈타인 수준이라는 것.」

다현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NASA에 가서 미사일도 혼자 쏘아 올릴 수 있는 두뇌라면서.」

「난 기계치라서 미사일 못만들어요. 그냥 쏘아올리는 거라면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현이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다.

「근데 그게 무슨 문제야. 당신 머리가 엄청나게 좋은 거랑 나랑 결혼하는게 무슨 연관이냐구.」

「그래도 괜찮아요?. 살다보면 내가 당신보다 앞서 나가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자존심 안 상하겠어요.」

「지금 막 자존심 상할려고 해. 도대체 날 뭘로 보고 하는 소리야.」

재인이 심술궂게 투덜거렸다.

「말로는 그러지요. 별 상관 없다구. 하지만 진짜 그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사람들 날 싫어해요. 그리고 이상하게 쳐다본다구요.」

그녀는 빠르게 얘기하고는 재인을 애써 외면했다.

아주 어린시절 철모르던 다현은 자신이 갖고 있는 놀라움을 공개했었다.

그리고 댓가로 받은 상처는 너무 컸다.  놀라움. 경외. 그리고 끝내는 외면과 소외로 이어지는 그 상처 이후 다현은 결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날 이후 그녀는 한 번도 어디에서도 1등을 해본 적이 없다. 그녀는 아주 의도적으로 최고를 피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왜냐면 그녀는 특별했으므로.

「당신 지능지수가 150이던 200이던 난 정말 상관없다구. 」

「아니요. 상관하게 될 거에요. 처음에는 신기할테구 그 다음엔 내 눈치를 보게 되고 그리고 나중엔 날 괴물처럼 생각하게 되요. 그래서 최후엔 날 피하지요.」

「당신 머리 좋다는 거 순 거짓말이구나. 살아가면서 다다가 자기 두뇌를 얼마나 이용하게 될 것 같아.」

「정확한 확률을 계산해 드려요?」

「삐딱하게 말하지마. 그 수법에 안 넘어가. 」

재인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다다, 나랑 살면서 미사일 쏘아 올릴 계획있어?」

「아뇨.」

그녀가 눈이 동그래져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우리 탐정사무실이라도 차릴까. 그래서 실적경쟁이라도 할래. 아님 우리 회사 와서 마케팅 순위라도 올릴까?」

그녀가 눈을 흘겼다.

「그런데 뭐가 걱정이야. 다다는 학교에서 그 좋은 머리로 애들 가리키고 난 내 회사에서 일하는데. 혹시 살면서 나랑 이차방적식 풀기 시합이라도 할 것도 아니고.」

「하지만 결혼해서 아내가 좀 특이하면 부담스러울 거 아니에요 ?.」

「당신이 왜 특이해?. 머리 좋은 게 죄야?. 부담스럽게 ?. 난 다다가 나랑 살면서 미사일을 만들고 인공위성을 쏘아올려도 상관없어. 뭐 그러구 싶다면

우리회사 주식을 팔아서라도 밀어줄 용의가 있어. 」

「내 말의 요점은 그게 아니라니까요. 난 특별하다구요.」

그녀가 비참한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래. 당신 특별해. 내눈에 다다는 처음부터 특별했어. 처음부터 엄청나게 끌렸다구.」

「거짓말하지 말아요. 처음엔 나한테 소리만 질러놓구선.」

다다가 눈을 흘겼다.

「물론 그랬지. 하지만 그때도 당신한테 반해 있었다구. 내 앞에서 그렇게 씩씩한 여자는 못봤거든.」

재인은 다다를 보고 미소지었다.

「그리고 나도 이 바닥에선 한 가닥 한다는 사람이야. 난 그냥 대충 보통 사람은 아니라구, TV나 신문에도 가끔 나올테구, 개인적인 시간 좀처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이 사람 저 사람 흘긋거린다구. 그래서 다다는 내가 이상하고 싫어?.」

그녀가 입이 쑥 나온 채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그 깜찍한 머릿속이 뭘루 채워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구.」

재인은 다현의 머리를 부여잡고 살짝 이마를 부딪혔다.

「뭐, 엄마 머리가 좋으면 애들 머리도 좋겠지. 애들이야 엄마 닮는다니까.」

「말로는 그래도 날 이상하게 볼지도 몰라요.」

그녀가 다시 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눈에 당신이 이상하게 보일 날까지만 내 옆에 있으라구. 앞으로 한 오십 년쯤 내 눈 침침해져서 당신 얼굴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니까.」

재인은 다현에게 깊숙이 입맞추며 중얼거렸다.

「그럼 결혼하는 거다. 하긴 당신이 뭐래도 난 결혼할거니까.」

에필로그

신랑신부의 눈에 띄는 아름다움은 놀라울 정도였지만 태하는 결혼식의 소란이 싫었다. 언론을 피해 조용하고 간소하게 이루어진 결혼이라 할지라도 일가친척들의

눈인사만으로도 태하는 충분히 지루했다. 하지만 둘의 결혼식을 눈물어린 시선으로 주시하고 있는 어떤 여자를 발견하고 그동안의 맘이 달라졌다.

그녀였다. 그날 저녁 붉은 옷을 입고 그를 유혹했던, 아니 그가 유혹하고 싶었던 그녀.

오늘 상아색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왔지만 그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봤다.

저 여자가 웬일로 재인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걸까.

재인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그를 포기할 수 없었던 걸까.

그는 그때부터 결혼식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그녀만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그녀를 찾아냈다. 이제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녀를 놓칠 생각이 태하는 없었다.

「사랑해.」

재인은 그녀의 베일을 걷어주며 다현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재인의 고백에 다현은 살짝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경건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재인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웠다.

하얀 베일에 싸여 그의 앞으로 걸어오던 다현은 이제껏 재인이 봐왔던 어떤 사람보다 더 아름다웠고 이제 그의 여자가 되어 그의 옆에 서서

두 사람의 반지를 전하는 일은 그동안의 모든 기다림을 참을 수 있을 만큼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느날 우연히 그에게 다가온 그녀가 오늘 그의 모든 것이 되었다.

지인과 친구들의 꾸준한 원성과 요구로 인해 그저 다다와 둘이만 있겠다고 끝까지 거절하던 재인이 결혼한지 네 달만에 할 수 없이 치른 집들이에

사람들이 빠지고 나자 태하와 현진이 남았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도련님 빈손으로 오셨어요.」

마지막까지 정리를 도와주며 일어서는 태하를 보고 다현이 짐짓 인상을 썻다.

「맘은 가볍게 손은 무겁게가 이번 집들이의 테마에요.」

「뭐가 필요하신데요 ?.」

태하가 예의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지만 다현은 여전히 싱글거렸다.

「많지요.」

태하는 다현의 장난스러움에 같이 미소지으며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꼼꼼하게 뭔가를 적어내리더니 다현에게 건네주었다.

태하가 건넨 명함 뒤쪽에는 핸드폰 번호가 있었다.

「백화점에서 맘에 드시는 물건 있으시면 이쪽으로 연락주세요. 언제라도 내려와서 식사부터 풀코스로 접대하겠습니다.」

「우와~ 이런 걸 절 주셔도 되요?」

「김다현. 입 찢어지겠다. 아무튼 흥미로운 명함이네요.」

다현을 대신해 이것저것 마무리를 끝낸 현진이 다현을 놀리며 일어섰다.

「... 현진씨도 필요하신게 있으십니까 ?.」

「그 매력적인 명함이 필요하군요. 」

분명히 현진은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 짙은 눈빛을 한 남자에겐 아니었나 보다.

태하는 현진의 농담에 다시 지갑을 열고 명함 한 장에 뭐라고 적으면서 또 다른 무언가를 현진의 손에 쥐어주었다.

태하가 현진에게 준 것은 백화점의 골드카드와 비밀번호가 적힌 명함이었다. 이 의외의 상황에 기세좋은 현진도 당황했고 다현이 눈이 둥그래졌다.

「이런, 도련님. 차별이 엄청 심하시네요. 저한텐 명함 하나만 달랑 주시고선.」

그들 중 오직 재인만이 태하의 긴장한 얼굴을 재빠르게 읽어내리고 픽 웃으며 다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당신한테 내 카드가 있잖아. 신랑카드 놓고 다른 남자 걸 쓰시겠다고. 」

웬일로 이 자식이 이런 행사에 나타나나 했더니 관심이 딴데 있었군.

「이봐. 통큰 남자. 여자들 손에 그런 걸 쥐어 주는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데...이왕 잘 보일려고 노력하는 김에 현진씨 좀 집에까지 모셔다 드려. 인천이다.」

재인은 태하의 얼굴에 잠깐 비치고 사라진 기쁨과 감사를 보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집으로 가실 거지요 ?. 오늘은  off라고 하셨으니까.」

재인은 현진을 태하에게 밀어붙이며 말했다.

유현진이라는 여자도 만만치 않을텐데. 잘해 보라구. 민태하.

재인은 태하에게 동지의식과 연민을 함께 느꼈다.

유현진이란 여자 역시 다다만큼이나 특별한 여자였으니까.

「어...아니에요.」

현진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거절했다.

「아닙니다. 제가 모셔다 드려야 하지만 오늘 이 망할 집들이 땜에 우리 시간을 못 가져 놔서요.」

재인은 웃으며 태하와 현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현의 귓가부터 시작해 흰목까지 키스를 뿌려댔다.

「제발 빨리 가주시는 게 절 도와주시는 겁니다. 이제부터 우린 할 일이 많거든요.」

「이 남자가...」

다현은 재인의 노골적인 애무에 기겁을 하면서 재인을 흘겨봤다.

「이제부터 재인씨가 할 일은 설거지밖에 없어요. 」

다현은 이제 거의 코를 그녀의 목에 파묻다시피 키스를 해대는 재인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태하에게 말했다.

「그럼 도련님이 우리 현진이 좀 데려다 줘요. 아마 차안에서 내내 자겠지만. 부탁 좀 드릴게요.」

「아...난.... 」

여전히 거절하려는 현진을 쳐다도 보지 않고 다현이 싱긋 웃으며 둘의 등을 밀었다.

「피곤하다며. 너 좋아하는 공짜 아니야 ?. 어서 타고 가라구.」

멈칫멈칫 태하에게 이끌려 나가는 현진의 뒷모습을 보고 다현은 미소지었다.

우리 도련님에게서 네가 1%의 어떤 것을 발견하길 바래. 유현진. 내가 찾아낸 이 사랑을 말야.

「저 둘 심상치 않지요 ?.」

굳이 뒷정리를 못하게 하는 재인을 피해가며 다현이 부엌을 치우며 말했다.

「몰라. 난 내가 심상치 않으니까. 」

재인이 벌써부터 흥분한 몸을 다현에게 밀어붙이며 중얼거렸다.

「내일 아줌마 시키자구. 응 ?. 그만해. 우리 이제 손님 같은 거 받지 말자. 」

재인은 그를 피해 버둥거리는 다현을 품에 가득 안고 침실로 옮기며 말했다.

「그냥 우리 둘이만 있자구. 」

「앞으로 당분간은 계속해서 우리 셋이에요.」

다현은 이제 겨우 6주가 된 그들의 사랑이 숨쉬고 있는 배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래서 더 좋아. 두 사람 모두 다 내꺼잖아.」

그는 정말 좋았다.

다다가 그의 품안에 있는 것도. 가장 사랑하는 여자의 품속에 자신의 분신이 커가는 것도.

「당신도 내꺼에요.」

다현은 재인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그의 품안에 얼굴을 묻으며 빙긋 웃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1%의 어떤 것은 나에게 운명이고 사랑이며 이재인이라는 이 사람이다.

<완결!>

* 로맨스 월드에서는 현재 불펌 금지 및 저작권 보호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온라인 저작권에 대해서 궁금해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아래 기사를 첨부했습니다.

살펴 보시고 불펌 방지 캠페인에 동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저작권 관련 자료 <출처 : 동아일보>

법조인들은 이처럼 남의 글을 퍼다가 인터넷에 띄우는 행위는 저작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지적한다. 1일 인터넷상에서의 저작권 침해 업체를

기소한 서울지검 컴퓨터수사부 김상우(金相佑)검사는 '인터넷에는 수많은 ‘퍼온 글’이 게시돼 있는데 이 글들의 상당 부분이 저작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김검사는 '이같은 저작권 침해가 문제되지 않는 이유는 피해자(저작권자)가 저작권 침해 사실을 잘 모르거나 알아도 고소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따라서 피해자가 형사고소를 하거나 민사 손해배상 소송을 내면 언제든지 걸릴 수 있다는 얘기다.

법조인들은 이제 네티즌들도 준법정신을 철저히 갖춰야 한다고 지적한다. 박성호(朴成浩)변호사는 '검찰이 인터넷에서의 저작권 침해자를 기소한 것은 가상공간에서도

현실세계의 저작권법이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넷에서의 저작권 침해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문제의 글이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되는 저작물인지 여부다. 예컨대 인터넷 신문의 경우 단순한

사실을 전달하는 시사보도는 저작물이라고 할 수 없지만 창작성이 가미된 해설기사 등은 저작물에 해당한다. 따라서 인터넷 신문에 올라 있는 해설 기사 등을

무단 복제해 다른 인터넷 사이트에 게시하는 것도 저작권 침해에 해당한다.

박변호사는 '인터넷상에서 남의 저작물을 인용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정당한 범위 내에서 공정한 관행에 합치하지 않는’ 경우, 예컨대 저작물 전체나

대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은 저작권 침해에 해당한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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