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 사거리
새벽 편의점
불면의 불빛
선명한 도시의 북극성
목마르고 허기진
유목민의 오아시스
고단한 삶의 길목
혼자 걷는 사람들
저마다 무거운 하루의
바코드를 찍으러
새벽길 더듬어
허위허위 들어온다
아 업아 업이로구나
어허 업이야 업이로다
대리기사 오씨 허탕 쳐
쓰린 속 사발면 한 그릇
성찬으로 달래고
타올공장 조과장은
복권을 긁으며
권고사직 막걸리 축배
가만히 홀로 드는구나
야간주유소 정씨
기름 쩔어 메슥한 속에
등터진 핫바 속터진 만두
우적우적 맛있더냐
새벽기도 가는 김권사는
생전 아들 좋아하던
바나나우유를 집어 들고
새벽반 학원길 취준생 최군이
엄마표 삼각김밥에
두유로 빈속을 채우는 곳
왕십리 사거리 새벽 편의점
가도 가도 갈 길 먼
도시의 유목민들
북극성 불빛 따라
허위허위 들어온다
아 업아 업이로구나
어허 업이야 업이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사발면은
김치고추주먹밥을 낳고
주먹밥은 즉석어묵을 낳고
즉석어묵은 참치죽을 낳고
참치죽은 봉지만두를 낳고
봉지만두는 삶은 계란을 낳고
삶은 계란은
에그샌드위치를 낳고
에그샌드위치는
훈제치킨을 낳고
치킨은 다시 사발면을 낳고
사발면은 또 허기를 낳아
허기진 일상이
여울목처럼 되돌고
뒤섞이는 곳
왕십리 사거리
새벽 편의점
몸도 마음도
목마른 도시의 유목민들
오아시스 물길 찾아
허위허위 들어온다
아 업아 업이로구나
어허 업이야 업이로다
매장 구석 스피커의
걸그룹 노래도 흥이 식고
실낱같이 여윈 희망이
날 잡아보라는 듯
가물가물 찬
새벽의 고개를 넘어갈 때
대리기사 오씨 사발면
김 서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슬어버린 입맛으로
사발면 뚜껑 열면
아, 면발처럼 맥없이
불어터진 생이여
쫄아든 국물처럼
찌들어 찌든 생이여
꼬인 면발들이
토해내는 한숨으로
왈칵 하고 눈가에
뽀얀 김이 서리는데
한 젓가락 입에 넣고
바라본 유리창에
눈물 같은 빗물이
소리 없이 흐르는구나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주르륵 영사막처럼
흘러내리는 빗물 속에서
대리기사 오씨는
만삭 아내의
부른 배를 보고
타올공장 조과장은
막내딸 불러주던
노랫소리를 듣고
주유소 정씨는
고향집 마당 비설거지하던
어머니를 그리고
바나나우유를 품은 김권사는
먼저 간 아들의 구원을 보고
취준생 최군은
레인코트 잘 차려 입은
비 오는 출근길을 본다
아 업아 업이로다
어허 업이야 업이로구나
새김질하며
다시 일어선다
그래도 버텨야지
그러니까 살아야지
그래도 살아야지
그러니까 버텨야지
좁은 어깨에 업을 지고
굽은 등에 꿈을 지고
굽이굽이 굽이진 길
가도 가도 왕십리 길
비구름 산마루에 걸려 울어도
빗속을 가르며 바람을 헤치며
십 리만 더 가자고
십 리만 더 가자고
다시 걸음 딛는다
아 업아 업이로다
어허 업이야 업이로구나